[시가있는아침] ‘묵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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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묵화’ - 김종삼(1921~84)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은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살자고 노래한다. 그러나 평화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해가 노래한 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을 닮아 있다. 정신과 육체의 정결한 청빈. 끝없는 용서와 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빛. 그럴 때 평화는 휴식처럼 온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의 손. 소의 적막과 할머니의 적막. 그것들이 모여 고요를 이루고 그 속으로 생의 실록이 잔잔히 퍼질 때 평화는, 종소리를 내며 온다.

<박주택·시인>

▶필자 약력=▶1959년 충남 서산 출생 ▶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꿈의 이동건축』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등 ▶소월시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등 수상 ▶현 경희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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