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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대륙고구려성>9.끝.국내성 환도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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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글:李憲益기자 사진:金璟彬기자 도움말:李進熙 (일본和光大교수.고고학) 林起煥(경희대강사) 국내성(國內城)은 광개토대왕碑.
장군총을 비롯한 고구려 유적의 보고 지안(集安)시내에 있다.환도산성(丸都山城)은 지안시에서 통구하를 따라 북쪽으로 2.5㎞떨어진 환도산(해발 6백76)에 위치해 있다.
국내성은 평지성으로 평시의 수도였고,환도산성은 유사시 왕과 군민이 들어와 적과 대치하던 성으로 두 성 모두 근래 고구려 유적 기행이 활발해지면서 국내에도 꽤 알려져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 22년(서기3년) 수도를 (졸본-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위나암성이 바로 환도산성이란 것이 학계의 일반적 의견이다. 같은 삼국사기를 보면 산상왕 2년(198년) 환도성을 쌓고,고국원왕 12년(342년)에는 국내성을 쌓는 한편 환도성을고쳤다는 기록이 나와 두 성 모두 계속 개.보축 했음을 알 수있다.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24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244년 중국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유린당했었다.그 이후에도 북방 선비족 모용씨에게 함락당한 아픈 기록이 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이 랴오둥(遼東)일대를 평 정한 제국의 발진기지가 바로 여기였으며 그후 고구려가 사라지기까지 만주(滿洲)경영의 전진기지라는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국내성은 성 동쪽의 용산(龍山),북쪽의 우산(禹山), 그리고서쪽의 통구하 건너 칠성산(七星山)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압록강이 흐르는 풍수상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요새다.
네모꼴인 성벽 둘레는 2천6백86로 1940년 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독립문 비슷한 모양의 성문(동.서 각2개,남.북 각1개)과 성벽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국내성 안은 아파트나 상가가 들어차고 그 사이로차도가 가로.세로로 뚫린 상태라 성문은 물론 성벽마저 거의 파괴돼 있다.다만 북쪽의 아파트群 사이에 마치 둑처럼 5~6단 정도가 남아 동서로 뻗쳐있다.통구하 옆 주택지 안에 있는 서벽은 잡초가 우거진채 민가마다 헛간이나 화장실의 한 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환도산성으로 가는 길 왼쪽으로 보이는 칠성산 산록에는 많은 고구려의 무덤들이 있고 밭 가운데나 길 옆 민가 마당안에서도 적석총들이 계속 눈에 띈다.
환도산성은 산성 정문 통구하 건너편에 있는 야산에 올라가 살펴봐야 그 전모의 대강을 알 수 있다.
그 산위에서 보면 환도산성의 내부구조는 물론 산성 오른쪽 바깥 평지에 있는 「산성하 고분군」이라는 이름의 무덤떼,무덤떼 뒤로 통화로 이어지는 옛길,그리고 산성 왼쪽 통구하의 굽이치는모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성하고분군에는 20여기의 큰 돌무덤과 10여기의 흙무덤이 있다.위에서 볼 때는 장관이었지만 산을 내려와 가까이서 살펴보니 대부분의 돌무덤들이 기단석만 옛 그대로고 그 위를 고증하지않은 채 엉터리로 보수해 문화재의 가치를 오히려 심하게 훼손시킨 상태였다.심지어 어떤 무덤은 콘크리트로 둘레를 쳐 나중에 복구도 못하게끔 해놓았다.
지안 시내의 벽화.고분들이 밭 사이에 그대로 방치돼 있고,태왕릉.서대총등이 거의 폐허처럼 돼있는데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유적 보호 대책은 물론 관광지화.공원화에 관한 체계적인 대책이시급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환도산성은 둘레가 약 7㎞에 이르는 큰 성이다.성벽은 정문 쪽으로는 통구하의 절벽과 급경사진 곳을 좌우 벽으로 삼고 능선을 따라가며 얕은 곳은 돌로 벽을 쌓은 전형적인 키모양의 고구려 산성이다.
***절벽 이용한 키모양 山城 농경제학자 김성훈씨가 이 성을둘러보고 10만명은 능히 주둔할만한 규모라고 짐작했을 만큼 성안에는 평지가 넓다.
정문인 남문은 좌우 성벽이 성문에 이르러 각각 안쪽으로 오므라든 옹성이다.
현재 동북쪽 산 위에 성벽이 잘 보존돼 있는데 길이 1백50여정도를 관찰할 수 있었다.
성안에는 4~5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36기의 무덤이 남아있고 주춧돌이 줄지어 놓여있는 3개의 건물터가 있는데 그 곳에서는 아직도 고구려의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전투지휘소가 있었던 언덕으로 가기 전에 음마지(飮馬池)로 불리는 연못이 있으나 물풀에 덮인 작은 규모여서 대군의 식수원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지금도 건물 축조 흔적이 남아있는 전투지휘소에 오르면 산성내부는 물론 통구하를 따라 저 멀리 펼쳐진 지안과 압록강까지도 어렴풋이 조망할 수 있다.
***천추총 출토 명문전 고구려의 대형 적석묘의 윗부분에는 건축물이 축조됐는데 천추총과 태왕릉에서 건축물의 잔해인 글자를새긴 벽돌(銘文전)이 출토됐다.
태왕릉에서는 「願太王陵安如山高如岳(원컨대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뫼처럼 높으소서)」이라고 새긴 벽돌이 나왔고 천추총에서는 「千秋萬歲永固(천년만년토록 튼튼하소서.사진)」와 「保固乾坤相畢(하늘과 땅처럼 튼튼히 보존되소서)」이라는 2 종의 벽돌이출토됐다.글자를 예서체로 양각한 이 벽돌의 글은 모두 왕릉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천추총과 태왕릉이라는 무덤의 이름도 이 벽돌의 글자에서 유래하였다(길림성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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