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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얼굴 안에 뇌쇄적 여인 숨어 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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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굴지의 화랑 장 푸르니에의 전속작가 출신인 서양화가 황호섭(54)씨의 개인전 ‘영원한 신비’가 24일 서울 청담동 화이트 갤러리에서 막을 올렸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그는 이번 전시에서 신비로운 부처의 얼굴을 가득 선보인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졸업 후 25년간 파리에서 활동하며 갤러리현대, 박영덕 화랑,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등 국내에서도 굵직굵직한 전시회를 열어온 황씨는 독특한 추상 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해에는 ‘미술평론가 6명이 선정한 현대작가 55인’에 이름을 올렸다.

서양화가 황호섭

그는 화가라면 당연히 지닐 법한 붓을 거부한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린 뒤 마르기 전에 물을 뿌려 씻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추상 회화를 남겼던 황씨는 이번 전에서 설치 미술 ‘부다 시리즈’ 를 내놨다. 그는 부처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90여 개나 되는 동망을 손으로 하나하나 꾹꾹 눌러 만들었다고 했다. 빛의 반사에 따라 색깔이 달리 변하는 부처 얼굴 속에는 뇌쇄적인 눈빛을 한 여인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저는 남들이 버리는 이미지를 사용해 작업하죠. 유명한 예술가들도 천편일률적인 화면을 선보이는데 저는 되레 화면을 구부리는 등 늘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이번 작품들은 그런 착안에서 태어난 산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귀찮아’하며 버린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한다. “인터넷 서핑을 하면 여기저기 버려진 이미지들이 많아요. 포토샵을 사용해 그것에 독특한 색감을 입히고 형태를 변형시키면 저만의 작품이 나오지요.” 신비로운 부처의 얼굴 안에 들어간 사진들은 ‘감히’ 헐벗은 차림의 여인들이었다. “부처의 얼굴을 보세요. 정말 편안하고 인자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점잖은 바깥 모습 안에는 도발적인 여인을 닮은 속마음이 숨어있죠. 세상의 본래 모습도 결국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몇 해 전 뉴욕에 머물던 시기에 우연히 지인이 선물해준 부처상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제가 불교 신자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선물 받은 부처상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거에요. 너무 편안해 보였죠.”

동망(銅網)은 햇빛과 시각에 따라 색감이 변하기 때문에 작품을 좀더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불로 열처리 작업을 해서 색깔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도록 했습니다. 눈, 코, 귀 등 형상은 손으로 일일이 꾹꾹 눌러서 만들지요.” 100여 점을 만든 그의 손가락은 굳은살이 가득했고 손톱도 부러져 나가 있었다.

“한꺼번에 모든 느낌을 전달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제 그림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빛이 바뀔 수록 색깔이 다르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작품을 천천히 감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빼앗아 버리는 작품은 좋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가의 의무는 사람의 생각을 넓혀주는 것이 아닐까요.”

푸르니에가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한국인이 전속작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1984년에 그를 우연히 알게 된 뒤 고등미술학교 졸업 전시에 푸르니에를 초대했는데 그가 안 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보다 더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전화를 걸었죠. 그런데 통화 뒤 10분쯤 지나 그가 “누가 미스터 황이냐?” 라고 물으며 전시에 와 준거에요. 그때가 푸르니에와의 첫 인연입니다. 그날부터 인생이 다 바뀌었습니다.”

그 뒤 곧바로 장 푸르니에 갤러리 전속 작가로 활동했고 유럽ㆍ미국 등지에서 수 십 차례 전시를 열어왔다. 프랑스 유명 미술평론가인 이브 미쇼 루앙대 교수는 “그가 표현하는 몽타주는 마치 워홀의 마릴린 시리즈나 재키 시리즈에 백남준의 전기적 상상력과 영감을 보탠 것 같다”고 평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부다 시리즈 중 30여 점은 세계 미술가들의 축제 ‘독일 쾰른 아트페어’에서 이미 독일 컬렉터들에게 앞다퉈 팔려나갔다. 국내 유명 작가들과도 작품 교류가 두터운 그는 현재 사진작가 김중만과 공동 작업을 논하는 중이다. 그는“앞으로 한국의 여인상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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