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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도 증권사 인수 ‘입질’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에 이어 현대중공업도 증권업 진출을 타진하면서 현대가의 적통 경쟁이 증권업계로 확전되는 양상이다.

현대그룹·현대차그룹·현대중공업그룹 등 현대가의 공방이 주식시장으로 확전되고 있다. 지난 2월 현대차그룹이 신흥증권을 인수, 주식시장에 뛰어든 데 이어 현대중공업그룹도 증권업 진출을 준비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공업이 증권업에 손을 대면 현대가 우산 아래 있는 증권사가 3개로 늘어난다.


현대가의 적통 경쟁은 총선 이후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정치활동 강화로 다소 소강상태에 빠진 상태다. 하지만 화약고인 현대건설 매각이 초읽기에 들어간 만큼 조만간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 범현대가의 물밑 행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월 신흥증권을 전격 인수해 현대차IB증권을 세웠다. 이어 최근에는 현대중공업그룹까지 증권업 진출을 모색하는 상태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두고 범현대가가 주식시장에서 대리전 또는 전초전을 펼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이전까지 현대가에서 증권업을 영위해 온 곳은 현대증권을 자회사로 둔 현대그룹뿐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차에 이어 현대중공업까지 증권업에 진출할 경우 현대증권의 입지는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또 현대그룹의 돈맥 역할을 하는 현대증권이 위축될 경우 향후 현대건설 인수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대증권은 현대그룹 계열사 중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알짜 회사일 뿐만 아니라 그룹 내 유일한 금융회사로 자금줄 역할을 해 왔다.

증권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범현대가의 증권업 진출은 현대그룹의 돈맥이라 할 수 있는 현대증권을 압박하는 요인이 된다”며 “7조원에 달하는 현대건설 인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자금모집 및 중개 기능을 하는 증권사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만큼 범현대가의 증권업 진출은 일종의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0여 곳 중 현대중공업 유력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현대중공업의 증권업 진출도 인수합병(M&A)을 통해 이뤄질 전망이다. 현대중공업은 올 초 시장에 공식 매물로 나온 CJ투자증권의 유력한 인수자로 거론되고 있다. 현재 현대중공업은 CJ그룹 측에 인수제안서를 제출하고 실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CJ투자증권 인수전에는 현대중공업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롯데, 한화, 두산, 아주그룹 등 굴지의 대기업을 비롯해 외국계인 푸르덴셜, 시티그룹 등 10여 곳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현대중공업이 물망에 오르는 이유는 CJ그룹 측이 고용승계를 위해 증권사를 보유하지 않은 기업을 우선인수대상자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증권사를 보유한 그룹이나 외국자본을 제외하면 막강한 자금력을 보유한 현대중공업이 가장 유력하다는 해석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말 기준 무려 6조원에 달하는 실탄(현금)을 보유한 상태다. CJ투자증권의 예상 매각가격은 7000억~1조원(CJ자산운용+경영권 프리미엄 포함)정도. 현대중공업이 인수 의지만 있다면 자금조달 걱정 없이 언제든지 자력으로 M&A가 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CJ투자증권 매각과 관련해 CJ그룹 관계자는 “모건스탠리를 매각 주관사로 선정한 후 현재 10여 개 회사가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일부는 실사를 진행하고 있다. 다음달 중순께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고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말해 매각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현대중공업이 CJ투자증권의 유력한 인수자로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현대중공업 측은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사실 확인을 미루고 있다. 집안 싸움으로 확대 해석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증권업 진출이 집안 싸움으로 비칠 경우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정치적 이미지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에 이어 현대중공업마저 M&A를 통해 증권업에 나서려 하자 현대그룹 내부에서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현대증권 직원들 사이에서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등 증권업계가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든 상태에서 현대증권만 피해를 보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증권은 현대가의 유일한 증권사로 그동안 현대그룹은 물론 범현대가 계열사로부터 직간접적인 영업 지원을 받아왔다. 하지만 범현대가가 잇따라 증권업에 진출함에 따라 그동안 누려왔던 후광이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현대증권 끝내 사면초가 되나

현대증권 고위관계자는 “현대차그룹 등의 증권업 진출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영업적인 타격”이라며 “당장은 피해가 없겠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토로했다.

증권사 한 애널리스트는 “바이코리아 이후 사세가 기울던 현대증권이 지금까지 업계 리딩 컴퍼니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현대라는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범현대가의 증권업 진출은 현대증권이 현대라는 보호막에서 벗어나 자력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현대차IB증권의 공식 출범으로 이 같은 우려는 이미 조금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차IB증권의 박정인 회장은 최근 ‘3년 내 5위 증권사 성장’을 목표로 공격 경영을 선언했다. 자본 확충은 물론 전문인력 채용, 지점 확대 등을 통해 3년 내 국내 5위 IB(투자은행) 전문 증권사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다.

특히 인력 및 지점 확대와 관련해 박 회장은 “전략 지역을 중심으로 현재 17개인 점포 수를 3년 안에 50개 수준으로 늘릴 예정이다. 이를 감안하면 전체 인력도 현재 350명에서 550명 수준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전략 지역이란 그룹 연고 지역인 울산과 서울·경기를 뜻한다.

현대차의 연고지인 울산 지역은 현대증권의 주식영업(브로커리지) 요충지기도 하다. 현대증권의 주식영업 실적 중 상당 부분이 울산 지역에서 나오고 있는 상태다. 현대증권이 서울·경기 다음으로 울산에 많은 지점(10개)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차IB증권이 그룹 연고지인 울산에 지점을 내고 공격적인 영업을 시작할 경우 현대증권은 영업 위축-실적 악화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게 될 수도 있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울산은 현대시라고 할 만큼 현대 직원이 많아 서울 다음으로 중요한 영업 지역”이라며 “현대차IB증권이 지점을 낸다고 당장 고객 이탈이 많지는 않겠지만 영향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현대증권은 영업적인 타격은 물론 인력 유출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통상 증권업계의 경우 증권사 성과급 지급이 완료되는 5월이 되면 본격적인 인력 이동이 시작된다.

업계 관계자는 “4월이 지나면 대다수 증권사의 성과급 지급이 완료되고 본격적인 인력 이동이 시작된다”며 “현대차IB증권의 경우 이미 직간접적으로 인력 스카우트에 나선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범현대가의 증권업 진출에 따른 현대증권의 사세 위축 가능성은 주가에도 반영되고 있다. 그룹의 대규모 지원이 예상되는 현대차IB증권의 주가는 3만4000원을 넘고 있는데 반해 영업위축이 예상되는 현대증권의 주가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1만5000원 선에 머물고 있다.

임상연 기자 sy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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