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표 한국미술硏소장 "대고려국보전"강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고려문화의 재정리를 위해 기획된 『대고려국보전(大高麗國寶展)』은 나전칠기.불화등 새로운 자료가 대거 소개돼 관심을 끌었다. 고려회화도 「산수화」등 7점이 국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이 분야의 새로운 연구붐을 일으키고 있다.지난 23일 열린 『대고려국보전』학술강연회에서 고려그림에 대해 강연한 홍선표(洪善杓)한국미술연구소 소장의 강연내용을 요약해 고려그림의 성격과 특징을 소개한다.[편집자註] 고려시대 회화가 우리 회화사에 남긴 가장 큰 역할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감상용그림이 등장한 사실이다.
감상용그림의 대두는 종래 종교적 실용기능과 조각,공예품중심의미술경향이 순수한 지적활동의 결과물,즉 조형 창조물로서 질적인전환을 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또 감상용그림의 태동은 일반회화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한 것을의미하기도 했다.이는 고려왕조의 지배세력들이 가진 문사적(文士的)성향과 유교적 문치주의 경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11세기 전반기까지는 뒷시기에 비해 언급할만한 화적(畵蹟)도 없을뿐만 아니라 전하는 기록조차 영세하기 짝이 없다.
고려회화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문신귀족체제가 확립된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이후부터다.
문종때부터 일반회화는 왕실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한묵(翰墨)풍류취향에 따라 여기적(餘技的) 문인화가가 출현하고 감상용그림 수요가 많아지는등 새로운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예는 문종이 1074년 김양감(金良鑑)을 중국에 사신으로 보내 상당량의 중국그림을 구입하고 또 사신편에 화공 여러명을 딸려보내 북송 상국사(相國寺)벽화를 모사해오게 했던 기록에서도 살필 수 있다.
또 이때부터 활발해진 북송과의 문화교류에서 시와 그림이 일치해야 한다는 문인화(文人畵)사상이 전래돼 귀족.문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 현종(顯宗)은 9세부터 서화를 좋아했고 인종(仁宗)도 음률과 서화를 잘했다.문인으로는 김부식(金富軾)과 그의 아들 돈중(敦中)이 묵죽을 잘 그렸고 정지상(鄭知常)은 묵매를 잘 그렸다. 이시대 직업화가는 고려사 열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이령(李寧)이 가장 뛰어났다.그의 솜씨는 북송 휘종(徽宗)으로부터중국 화원들을 가르치라는 명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고려후기에는 중국 사대부의 영향으로 소나무.대나무등 본격적인문인취향의 초목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또 중국 남북의 문화권이 갈라지면서 고려에서는 두가지 양식을절충해 비로소 고려풍의 그림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대고려국보전』에 소개된 일본 상국사소장의『산수도』는 이런 절충적 화풍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이 작품에서 여러 양식이 잡다하게보이지만 강과 강변의 불명확한 처리,구불구불한 산길의 묘사법등은 중국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려풍이다.
공민왕이 그렸다는『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에 보이는 인물들은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고려시대 회화솜씨의 뛰어난 기량을 잘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고려회화는 전반적으로 중국에서 다양한 회화사조와 화풍을 수용해 보다 다양하고 심화된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과 성향은 곧바로 조선초기로 이어져 조선시대 회화발달의 근간을 이루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