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맥주 따르기의 달인 “단골 성화에 은퇴도 못 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일본 최고의 번화가인 도쿄 긴자(銀座)의 중심부 주오도리 나나초메.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집인 ‘삿포로 라이언’은 18일 오후 5시부터 손님들로 북적댔다. 280석의 자리가 거의 가득 찬 가운데 5명의 예약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자리로 안내되자 “‘에비하라’ 맥주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에비하라’라는 맥주는 브랜드가 아니라 사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그 주인공은 23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맥주 따르기 장인(匠人)’ 에비하라 기요시(海老原淸·60·사진)다. 카운터에서 주문받은 에비하라는 맥주를 능숙하게 따랐다. 800cc가 들어가는 대형 생맥주 잔이 거품과 함께 가득 채워지는 데는 불과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에비하라는 이 가게의 하루 평균 주문량 1000L 가운데 10분의 1인 100L를 따른다. 약 200잔이나 된다.

하루 1000명, 연간 30만 명의 맥주 애호가들이 찾는 이곳에서 에비하라는 1985년부터 잔에 맥주를 채워왔다. 66년 처음 취직한 때부터 따지면 근무 기간은 42년으로 늘어난다.

올 1월 정년을 맞아 퇴직했지만 삿포로 라이언과 ‘에비하라 맥주’를 즐기는 단골들의 요청으로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매주 월·수·금 사흘만 출근하고 있다.

에비하라는 “당초 회사에서 정년을 연장해 준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털어놨다.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쉴 틈 없이 카운터로 주문이 날아드는 맥주를 따를 때는 혼신의 힘을 쏟아 붓기 때문에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가 크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서서 일하는 것 때문에 그는 5년 전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져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생각만큼 편하지도 쉽지도 않은 맥주 따르기에 에비하라가 인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으로 장인 정신을 존중하는 일본인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아무리 단순한 기술일지라도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노하우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면 한 직장에서 60세 정년을 채운 뒤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 풍토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에비하라도 맥주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그만의 관리 비법을 42년째 지켜왔다.

에비하라는 “맛있는 맥주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청결”이라고 말했다. 오래된 맥주가 남아 있으면 효모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맛을 변질시키기 때문에 맥주 탱크를 깨끗이 세척해야 한다. 핵심 작업이라서 한 번도 후배들에게 맡긴 적이 없다. 깨끗한 탱크 관리 다음에는 적절한 발주 타이밍이다. 맥주는 2~3일 내에 소화해야 가장 제 맛이 나기 때문에 고객이 밀려들 때 맥주가 품절이 돼도 안 되지만 들여온 맥주가 너무 오래 남아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도 피해야 한다.

에비하라는 “일기예보와 뉴스를 늘 챙기고, 고객들의 예약 건수를 주목하는 것도 발주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달된 맥주는 2도의 저온이 유지되는 지하 맥주 저장고에서 안정화 단계를 거친다. 트럭으로 실려오는 동안 맥주가 흔들리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의 압력으로 탄산가스를 주입해 24시간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에비하라의 ‘묘기’는 맥주잔을 11도로 기울여 맥주를 따르는 마지막 단계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40여 년 감각으로 터득한 것으로 맥주를 따를 때 미세한 거품이 가장 잘 생기는 각도”라며 “거품과 액체의 비율이 3대 7일 때 맛은 물론 보기에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맥주의 톡 쏘는 맛을 내게 하는 탄산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 마실 때까지 거품 막을 꺼뜨리지 않고 마셔야 한다”며 음주 요령까지 알려줬다. 그가 왜 ‘맥주의 달인’이라 불리는지 생생하게 실감하는 대목이었다.

에비하라는 “자신을 맥주 따르기 명인으로 만든 것은 결국 고객에 대한 사명감과 배려”라고 말했다.

삿포로 라이언 비어홀이 긴자 나나초메에 들어선 것은 74년 전인 1934년으로, 내부 장식이 창업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을 만큼 역사와 전통이 있기 때문에 맥주 맛에도 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비하라는 “수십 년째 출입해 온 일부 고객이 아들과 손자까지 데려와 3대째 ‘에비하라 맥주’를 찾게 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부 고객은 지방에서 출장 오면 반드시 들르기도 하고 10명가량의 고객은 매일 저녁 에비하라 맥주를 마시러 온다.

지바현의 농가에서 8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에비하라는 “고교 졸업 후 긴자에서 일해 보고 싶어 긴자 라이언에 지원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며 “체력이 다할 때까지 맥주를 따르겠다”고 밝혔다. 에비하라는 “내일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라며 이날도 밤 늦게까지 거품 가득한 맥주를 따랐다.

글·사진=김동호 도쿄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