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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골탕 먹인 알카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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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스페인 유권자들은 알카에다의 테러에 굴복한 걸까. 아니면 집권 국민당의 거짓말에 분노한 것일까.

미국에서도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 테러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자는 시위가 있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 폭력의 고리가 영원히 끊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런 목소리는 묻혔다. 미국은 이슬람 테러 세력들을 무섭게 응징해 갔다. 미국민은 그런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따라서 당장은 스페인 유권자들이 테러에 굴복한 것으로 보이지만 전적으로 굴복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테러의 충격을 이겨나가면서 어떤 결의를 어떻게 다져나갈지 아직은 속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집권 국민당도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밝혀지면 총선에서 표가 떨어질 것으로 생각해 슬그머니 정보를 조작하려 했던 정황도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의 총선 결과를 지금 어느 한쪽으로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알카에다는 소기의 목적을 깔끔하게 달성했다는 점이다. 이라크전 참전을 결정하고 미국을 적극 지원했던 집권당이 권좌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사한 형편의 다른 나라 정권에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또 하나 분명해진 사실은 세계화가 우리들의 삶뿐 아니라 국제정치의 역학마저 상당부분 바꿔버렸다는 점이다. 미 국방비는 세계 각국의 국방비를 모두 합한 것의 38%다. 미국 다음으로 국방비를 많이 쓰는 11개국의 국방예산을 합한 것과 같다. 2006년엔 미 국방비가 세계 국방비의 절반으로 늘어난다. 그럼에도 미국의 국방예산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냉전시대보다 오히려 작다. 미국의 경제규모가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 막강한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의 오지에 숨어 근근이 연명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추종자들을 막을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계화 때문이다.

사람.물자.정보의 국가 간 교류가 더욱 자유로워지면서 테러리스트들은 24시간 안에 세계 곳곳에 출몰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1개 여단을 중동지역으로 옮기려면 아무리 단축해도 사나흘은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압도적 물리력만으로 테러리스트와 싸움을 벌이겠다는 것은 난센스다. 그것은 마치 20세기적 힘으로 21세기를 지배하겠다는 무모함과 마찬가지다.

미국이 이라크전을 제기한 가장 큰 이유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타도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개전 이후 한달간 200억달러 이상을 전비로 썼다. 최근엔 질서유지 비용으로 한달에 40억달러씩 써야 한다. 그러나 알카에다는 폭탄 몇 개로 스페인 정권을 갈아치웠다.

미국은 이제 효과적인 테러대책을 생각해야 할 때다. 그 출발은 "그들은 우리를 왜 미워할까"하고 자문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근본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아무리 국경의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동맹국에 아쉬운 소리를 한다 해도 '견딜 만한 수준'으로 테러를 억누르기는 불가능하다.

테러리스트는 확신범이다. 이들을 몽둥이로만 때려잡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유신정권과 5공화국의 경험을 통해 확신범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민주화 투쟁과 테러는 같지 않다. 테러에는 몽둥이도 필요하다. 그러나 몽둥이는 최후의, 또는 보조적 수단이어야 한다. 그것만으로는 테러를 잡을 수 없다.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