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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家] 농암 이현보 17대손 이성원씨 긍구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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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안동이다. 집을 말하면서 어찌 안동엔 내려올 생각을 않느냐는 꾸지람 겸 초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풍기를 지나 봉화를 거쳐 청량산을 끼고 돈다. 시루떡 같은 암벽에 넋을 놓는 사이 금방 도산면이 나온다. 새로 생긴 중앙고속도로는 안동을 중앙으로 부쩍 가깝게 끌어당겨놨다.

안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중환의 '택리지'를 들고 온다. 땅에는 세 가지 정도 구분이 가능한데 볼 만한 땅, 놀 만한 땅, 살 만한 땅이 있다는 것이고 살 만한 땅(可居處)으로는 영남의 도산과 하회가 최고라는 것이다. 이젠 거의 관광지가 되어버려 사람을 당황케 하는 하회는 말고 지금 나는 도산을 찾아가는 길이다. 도산에는 물론 퇴계의 서원이 있다. 그러나 서원과 퇴계가 도산의 전부는 아니다.

차가 흔치 않던 시절 도산서원은 당연히 걸어서 갔다. 물소리 요란한 길을 바위를 타넘으며 솔가지를 젖히며 걸었다, 강변에는 우람한 바위가 여럿 있고 바위 위엔 엄청나게 커다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농암(聾巖)이었다. 내 눈이 어려 글자가 더 커 보이고 획수가 더 복잡해 보였을 수도 있지만 (한 글자의 크기가 75㎠라니 어른 눈으로도 크긴 하다) 물이 허옇게 소쿠라지던 바위 위의 글자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압도적 영상이었다. 앞에는 부내(汾川)라는 강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강물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들엔 벼가 도도한 물결(부내는 문전옥답 70만평을 가졌던 마을이었다)을 이루고 길가엔 깨꽃과 도라지꽃이 하얗게 피어 고소하고 쌉싸름한 냄새를 번갈아 풍겼다. 도산서원은 부내에서 1km를 더 들어가야 나온다고 했다. 알다시피 농암은 조선시대 한글 어부사 14수를 처음 쓴 전원시인이자 청백리인 이현보의 호이고 부내는 그의 향리였다.

안동댐이 담수를 시작한 건 1974년, 분천과 농암은 75년 수몰되었다. 아니 물속에 차마 수장시킬 수가 없어 부내의 농암 종택, 서원과 딸린 정자와 별당들은 여기 저기 흩어 옮겼다. 농암이라 새긴 바위돌은 뿌리가 깊어 뽑아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글자 부분만 잘라내 옮겨간 애일당의 뜰 아래로 실어갔다. 부내의 농암 후손들은 그렇게 고향을 잃었다.

지금 새로운 분강촌에 살고 있는 이성원씨는 농암의 17대 종손이다. 스물 몇에 고향을 수몰하고 틈만 나면 안동 인근의 산야를 헤매고, 헤집었다. 그러는 중 절로 산과 바위와 흙과 내와 물굽이와 소와 여울과 거기 흐르는 바람과 고요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갔다. 산과 강과 들을 헤매 다닌지 스무해쯤 돼서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도산서원 너머 퇴계 종택이 있는 도계(퇴계의 호는 여기서 왔다)를 지나 그 옛날 골기와집이 즐비하던 상계와 하계를 지나 시인 이육사의 마을인 아름다운 원촌을 지나 길이 끊어지는 무인지경의 협곡 안으로, 청량산의 발밑까지 썩 더 들어갔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났다. 갑자기 개울가의 지경이 넓어졌다. 배산임수, 냇가의 자갈과 흰모래, 푸른 솔과 깎아지른 단애, 물에 발을 담근 넙적한 바위까지. 잃어버린 부내와 똑같은 땅이었다. 앞 들이 약간 옹색해보이는 것만이 다를까.

뛰는 가슴을 억누른 채 부인 이원정씨를 데리고 다시 왔다. "나는 이제 여기 산다. 여기다 우리 집을 지을 거다. 부내를 이리로 옮길 거다." 의사봉을 두드리듯 통고했다. 그게 10년 전, 조금씩 땅을 사들였다.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옛 분천으로부터 불과 7km 떨어진 청량산 초입이었다.

"여기가 퇴계가 노래한 고산 구곡입니다. 낙동강 700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강변과 마을이 여기 다 모여 있었지요. 지금은 수몰돼 흔적만 남았지만. 상류 쪽이라 가송리는 용케 남아 있었어요. 낙동강은 하회만 가도 사행천을 이루며 강이 심심해지는데 여기는 협곡이 있고 소가 있고 굽이가 있고 강변에 둥근 자갈밭과 흰 모래가 있어요. 이곳에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 옛날 퇴계의 산책로였습니다. 지금도 희미하게 그 '예뎐길'이 남아 있지요."

이 퇴계오솔길에 대한 종손의 사랑은 넘치고 들끓는다. 거기에 대해 원고지 수백장의 글을 썼다. 퇴계 문집을 찾아 냇가의 바위 이름, 벼랑의 이름, 소의 이름을 모조리 밝혀냈다. "저기가 벽력암, 여기가 학소대, 여기가 월명담, 단사협, 갈선대. 고산정, 왕모당, 그리고 청량산의 수많은 암자들," 그 길을 수백번 걸었다. 희미했던 옛길이 그의 발길에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퇴계는 진성 이씨이고 농암은 영천 이씨다. 안동 양반들은 타성이라도 남이 아니다. 외가 아니면 고모가 아니면 이모가로 서로 얽힌다. 이 얽힘이 두셋 중복되는 일도 흔하다. 농암과 퇴계도 그렇게 얽혔다. 서른여섯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어울려 시를 짓고 이곳 가송리와 청량산 일대를 유산하며 숱한 시가를 남겼다.

원래 3000평에 터잡으려 했던 종가는 10년 만에 종손의 노력으로 1만5000평의 언저리를 두르게 됐다. 뒷산 5만평도 기어이 사들였다. 재작년엔 23년간 몸담았던 학교(고등학교 한문선생이었다)를 사직했다. 퇴직금도 필요했고 절대시간도 필요했다. 그런 뒤 종손은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단 긍구당을 옮겨왔다. 사당을 옮기고 안채와 사랑채를 똑같이 복원했다. 궁전을 짓던 대목이 불려왔다. 농암유적지 복원의 타당성을 인정받아 우여곡절 끝에 상당한 나랏돈을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긍구당은 지은 지 600년이 넘은 집이다. 가로 세칸, 세로 두칸의 자그만 몸체에다 서북 모서리에 한칸의 온돌방이 덧붙여져 독특한 니은자 꼴을 하고 있다. 전면 3칸은 모두 앞내를 바라볼 수 있는 루마루인데 마루 끝엔 궁창난간을 달아 단정하고 우아하다. 여러번 옮겨다니는 운명을 지녔건만 당차고 의연한 기상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네귀가 살짝 들린 팔작지붕위로 바람과 구름이 흘러가고 세월은 여기 오면 흐름을 멈춘다. 온돌방은 눈길은 따스하나 입매는 매운 선비같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손이 오면 여기 묵을 수도 있는데 1467년생 농암이 바로 이방에서 태어났다 한다. 농암이 부내에 내려와 집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마흔넷, 10년 전 이성원씨가 새 집터를 잡은 것도 그 나이 어름이었다. 농암이 고을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버리고 귀거래해서 강호시인이 됐듯 종손도 한문학 박사를 받은 뒤 직업을 버리고 귀거래해 글을 쓴다. 보종과 종가중흥의 책무를 스스로 짊어진 채.

"21세기 종손의 할일은 뭔지를 고민하지요. 보인회라고 경북 일대 불천위 종가의 40 ~ 50대 종손 16명이 어울리는 모임을 최근 만들었어요. 젊은 종손이 겪는 고민을 공유하고 종가문화를 계승하자는 논의가 치열합니다."

그는 지금 농암종가를 개방 중이다. 비단 영천 이씨 후손이 아니더라도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싶은 이들은 농암종가에서 묵어갈 수 있다. "고향을 만들어주고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고 뿌리의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게 종손의 책무지만 그 범위를 좀더 넓힌다고 안될 게 뭡니까."

겉모양은 옛 분천의 종가를 그대로 따랐지만 부엌과 화장실(사진)은 현대식으로 꾸민 것도 그런 열린 생각의 결과다. 마루방 문설주엔 입춘방 아닌 '於思臥'라는 낯선 글자가 붙어있다. 궁금해하자 "농암할배 글에 나오는데 기억 안납니까.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할 때 그 어사와잖아요"한다. 마흔중반의 종부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며 고춧가루 넣은 안동식혜를 들고오자 집안 안노인 하나가 이렇게 칭찬했다. "종손 자네는 참말로 득처를 잘해 공명을 한데이."

과연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안동이다. 눈비도 글읽듯이 내려오시고 /바람도 한 수 읊으며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도 덩달아 댓구로 짖는 동네( 유안진의 안동)에 농암 긍구당 종손이 잃었던 종가를 30년 만에 다시 끌끌하게 일궈내고 있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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