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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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전 그런 것 못해요!』 희경이 조그맣게 대답했다.아무리 이남자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같았지만 어떻게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남자는 희경이 거절하자 아무 말도 없었다.희경은 남자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그 남자는 아무 일도 없는 양 어깨를 어루만졌다.희경은 겁이 더럭 났다.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일을 저지르는 남자다.말많은 남자야 말로써 해결하면 되지만 소리없이 일을 저지르는 남자는 속수무책,해결책이 없다.희경은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들 었다.이 남자가 나를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나….희경은 다시 그 남자를 힐끔거렸다.남자는 붕대를 어루만지다 희경에게 씽긋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오늘따라 왠지 섬뜩하고 차갑게 느껴졌다.희경은 자기도 모르게 속 으로 소리를 질렀다.안돼! 남자는 자기 말을 안듣는 여자를 가장 싫어한다.
희경은 남자가 자기 말을 안듣는 여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희경은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그런 것 못해요! 하지만 당신이 하라시니 하겠어요.당신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남자는 다시 빙긋 웃음을 띠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당신은 옛날의 당신이 아니오.아치 위에서 나만 바라보면서 몸을 던지면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나오.
당신이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을 것이오.지난 번에는 마음만이 바뀌었지만 이번에는 몸과 마음 이 다 바뀌는 거요.그리고 약속하리다.당신이 다시 깨어난 후에는 언제까지라도 당신 곁에 있겠소.당신의 새로운 모습은 나의 이상형일테니까.물론 당신의 아이들도 내 아이로 삼고….』 희경은 속으로 뛸듯이 기뻤으나 겉으로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사의를 표했다.
아무리 기뻐도 촐싹거리는 것은 여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다.희경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이제 15분 남았다.시간은 참 잘도 간다.저 건너편 아치로 몸에 줄을 감은 특수요원들이 기어올라가고 있었다.발 아래로는 넓고 두터운 사각의 매트리스 상자가풍선처럼 부풀려 펼쳐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특수요원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저 멀리로는 앰뷸런스도 한 대 보였다.참 웃기는 사람들이다.손만 까 딱하면 꼼짝못할 것들이….희경이 다시 칼을들어 아이의 목에 긋는 시늉을 했다.특수요원들의 동작이 멈칫하며 정지했다.아이가 더듬거리며 희경에게 물었다.
『아줌마,우리 엄마 죽였어요?』 『왜,엄마가 죽었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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