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발자국은 신발을 닮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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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발자국은 신발을 닮았다’ 부분-이원(1968~)

발을 넣으려는 순간 왈칵 어두운
현관의 두 짝 신발이 축축하게
제 몸을 다 벌리고 있다
허공에 있던 발을
내리고 주저앉으니
공기의 냄새가 비어 있다
신발 안을 들여다본다 꾹꾹
몸이 걸었으므로 길이 되어버린
마음이 우글우글하다
신발을 굽어보던 빈 몸이
뻣뻣해 벽에 몸을 기댄다
길이 되지 못한 벽이 움찔거려
기댄 벽이 무겁다 세계의
어디서나 출입구는
입과 항문처럼 뚫려 있다
두 발로 단단한 바닥을
딛으며 다시 일어선다
(새삼 발자국은 신발을 닮았다!)
신발 속으로 현실의 발을 집어넣는다
그 속은 아득하고 둥글다
한 발을 살짝 문밖으로 내민다
덥썩 세계의 입이 닫힌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물을 신발처럼 신어 볼 수 있다면. 봄날 환한 골목을 걸어가는 아가씨의 발걸음을 뒤따라가며 싱겁게 몇 발자국을 그 흔적에 넣어본 적이 있지만. 햇빛이 물처럼 고인 그런 흔적들에 신발을 넣어보다 보면, 귀갓길 골목에서 폐지를 줍고 있는 노파의 둥그런 허리가 삶의 노고로 헤어진 신발 같아 죄송하기만 하다. 신발들에겐 우리들의 삶이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위 시에서처럼 “몸이 걸었으므로 길이 되어버린/마음이 우글우글하다”. 그러나 현관에 축축하게 젖은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두 짝 신발엔, 우리가 걸어가지 못한, 꿈으로만 남은, 그런 길들이 벽에 기댄 채 헝클어져 있구나.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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