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저녁이면 가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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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저녁이면 가끔’-문인수(1945~ )

저녁이면 가끔 한 시간 남짓

동네 놀이터에 나와 놀고 가는 가족이 있다.

저 젊은 사내는 작년 아내와 사별하고

딸아이 둘을 키우며 산다고 한다.

인생이 참 새삼 구석구석 확실하게 만져질 때가 있다.

거구를 망라한 힘찬 맨손체조 같은 것,

근육질의 윤곽이 해지고 나서 가장 뚜렷하게 거뭇거뭇 불거지는

저녁 산,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의 우람한 어깨며 등줄기가

골목 어귀를 꽉 채우며 깜깜하다.

아이 둘 까불며 따라붙는 것하고

산 너머 조막손이별 반짝이는 것하고, 똑같다.

하는 짓이 똑같이

어둠을 더욱 골똘하게 한다.


문인수의 시는 나직나직한 음성이지만 슬픔에 젖은 우리들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려주는 나이 든 친척을 닮았다. 시인은 저녁마다 집 앞 놀이터에 나와 동네 사람들의 사연을 제 것인 양 듣고 있다. 오늘은 지난해 아내와 사별하고 딸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젊은 사내의 삶을 만져주고 있다. 골목의 놀이터에서 어스름 속에서 불거지는 저녁 산의 거뭇거뭇한 자국과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대비시킨 장면이 뭉클하다. 사내의 등 뒤에 아이 둘이 따라붙는 것이나 저 멀리 저녁 산에 조막손이별이 반짝이는 것, 모두 똑같다. 삶이란 근육질의 윤곽이 해지고, 흐려지면서, 그 쓸쓸한 순간에 어둠의 바탕에 돋아나는 그런 별빛 같은 것이다.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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