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기행>"신뢰"-프랜시스 후쿠야마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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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를린장벽이 허물어지던 지난 89년,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향한각국의 노력이 어떤 정치형태가 가장 이상적이냐를 둘러싼 해묵은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은 『역사의 종말』을 발표해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프랜시스 후쿠야마.그가 이번에는 「역사이후」21세기 자본주의 질서에서 주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을 갖춰야하는가를 분석한『신뢰』(Trust.The Free Press刊)를 발표해 또다시 세계 지식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속편격인 이 책에서 각국의 경제와 사회문화의 상관관계를 해부,『경제적 승패는 그 사회의 문화가 신뢰도와 연대감을 어느 정도 귀중하게 여기느냐에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다.정보혁명으로 국가통제력의 약화가 가속 되는 상황에서는 사회문화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다.이같은 주장은미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개인주의라는 시각을 보이는 보수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살 것으로 보인다.
사회학자이자 싱크탱크 랜드 코퍼레이션의 연구원인 후쿠야마는 『자유주의 정치 및 경제기구는 그 생명력을 건전하고 다이내믹한시민사회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후쿠야마가 말하는 다이내믹한 시민사회의 최대 자산은 바로 사회 구성원간 의 신뢰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유대관계.신뢰와 유대가 미덕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경제수준과 국제경쟁력이 특히 높았다는 견해다.다시말해 한 사회의 산업구조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한 국가의 정책이라기보다 시민사회의 문화라는 것 이다.후쿠야마는 한 사회가사회구성원들이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는 문화를 확보하면 경제면에서 재정적인 자본에 못지않은 「사회자본」(social capital)을 얻는 셈이라고 말한다.그는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회에서는 공 동작업이 수월해져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엄격한 규율이나 복잡한 법적 계약이 불필요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례분석에서 한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은 가족중심적이어서 신뢰도가 낮은 사회로,독일.미국.일본은 사회신뢰도와 공동 유대감이 높은 사회로 분류된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자본주의 국가로 성공한 미국.일본.독일의 경우 얼핏 보면 크게 다른 것 같지만 엄밀히 분석해 보면 GM.도요다자동차.지멘스 등 대규모이면서도 전문관리인이 경영하는 대기업이 경제를 주도하는 공통점이 발견된다는 것이 다.이들 국가에서 대기업과 전문관리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신뢰를 중시하는 사회문화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 반면 한국.프랑스.중국.이탈리아는 소규모의 가족경영 기업체들과 소수의 국영 혹은 거대기업에 지배되고 있다.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는 가족외의 다른 사람들을 좀체 믿으려 들지 않기 때문에 대규모기업이 어렵다는 것이다.이를 뒷받침하 는 극단적인예로 후쿠야마는 중국계 회사로 컴퓨터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왕(Wang)컴퓨터사의 「붕괴」를 들고 있다.이 회사의 설립자가전문경영인을 믿지 못하고 무능한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줘 스스로자기 무덤을 파는 결과를 낳았다는 견해다.
이런 문화가 팽배한 나라에서는 대규모산업을 일으키는 유일한 방법이 국가개입이다.그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는 비효율적인 행정.정치부정.정당분열 등이 공통적인 병으로 꼽히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내에서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뒤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후쿠야마는 이들이 노예생활을 통해 그들의 문화가 뿌리째 뽑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경제발전의 결정적 요인으로 문화를 꼽는 후쿠야마의 시각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소수계에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치는 어퍼머티브 액션 지지자와 문화다원주의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그의 주장 이면에는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시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 붕괴후 동구권의 움직임을 보면 문화의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진다.바츨라프 하벨 체코대통령의 취임 일성도 정치 및 경제 자유주의를 받쳐줄 수 있는 문화의 구 축이었다.
하지만 국제경제계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유연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대기업보다 소규모기업들이 유리하다」는 마당에 대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후쿠야마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이 점에 대해 후쿠야마 자신도 솔직히소기업의 유연성을 인정한다.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중소기업들이 서로 연계,유연성과 규모의 경제를 동시에 확보하는 형태다.하지만 그처럼 기업들이 상호협력하는데도 신뢰가 바탕이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후쿠야마는 21세기 경제대국으로 촉망받는 중국에서 소규모기업들간의 상호 연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鄭命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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