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열며>티끌속의 宇宙샘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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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서해안의 무인도(無人島)들을 자주 찾는다.외딴 섬들에는 세찬 바람과 파도에 의해 아름답게 다듬어진 돌들이 많다.그것들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주워다가 누구에겐가선사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그러나 이 생각은 금 세 시들해진다. 요즘에는 기계가 돌을 잘 다듬는다.내가 무인도에서 애써 얻은 돌을 준다고 해도 받는 사람이 별로 고마워할 것같지 않다.
나는 기계 앞에서 아주 작아지고 만다.
그런데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기계뿐만이 아니다.큰 액수의 돈도 있다.요즘에 떠도는 헤아리기 어려운 규모의 비자금(비資金)설은 평범한 시민들을 멍하게 만든다.
나는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또 장관직 정도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분이 정치적인 술수로 낭설을 터뜨렸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비자금이 있을 수 있다거나 한 나라의 장 관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횡설수설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그리고「당했다」는 느낌을 갖는데 있다.
평범한 시민이 1억원을 모으려면 매월 1백여만원씩 저축한다 해도 거의 10년이 걸린다.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때 한 사망자의 보상금은 2억5천만원 정도였다고 한다.삼풍(三豊)백화점 사고의 희생자들도 이에 준해 보상금이 교섭되리라고 한다.4천억원이나 1천억원이 아니고단 1백억원이라 하더라도 아주 큰 돈이다.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은 백억.천억원을 실제로 주무르거나 입으로라도 들먹거릴 때 보통 시민들은 몇 푼 안되는 지하철요금인상을 가지고 신경을 써야 한다.저 큰 돈 앞에서 우리는 아주작게 오그라들고 만다.
한데 말이다.참으로 묘하게도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물질적인 규모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건을 기계로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다거나 자기의 힘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이 넓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하고 의미있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화엄경에는「한 티끌 가운데에 모든 세계가 포함돼 있다」는아이디어가 있다.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에도 전 우주의 견본(見本)이 들어있다는 뜻이다.작은 것은 큰 것의 축소판이다.작은 것에서 물리(物理)를 터득한 사람은 큰 것의 물리도 미루어 알수 있다.
사람으로서의 자기를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을의 통.반장 일도 잘 할 수 있고,면장이나 동장의 일을 참으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도지사나 광역시장의 일도 잘 할 수 있다.자기의 영역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지 그 영역이 얼마나 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라는 역(驛)을 통과하는 과객(過客)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사람은 1백년 이상을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한다. 무량억겁(無量億劫)의 긴 시간 속에서 우리의 짧은 삶이어떤 큰 역에서 얼마나 큰 소리를 쳤느냐에 의해 우리가 잘 살았다,못 살았다를 가늠할 수는 없다.1천억원을 소유했느냐, 1원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전 우주의견본을 보았느냐 말았느냐에 의해 우리의 삶이 참다웠느냐 마느냐가 갈라진다.
세계의 모든 바닷물을 다 들이마셔서 짠맛을 알려고 하는 것은어리석은 일이다.세계의 모든 땅덩이를 빠짐없이 밟아서 세계 여행을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가지고 참답고 아름답게 사랑을 나누며 살면 그 속에 4천억원이만들어낼 수 없는 묘(妙)한 행복이 있다.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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