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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마겟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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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계 초침이 자정을 향해 다가갔다. “평택에서 예수님이 꽃마차를 타고 재림했다”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하얀 옷을 입은 신도들이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예민해진 신경은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했다. 생방송 중인 TV카메라 조명을 따라 나방이 날아오르자 “온갖 만물이 휴거(携擧·들림)를 시작했다”는 고함이 터졌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도 아마겟돈은 없었다. 누구도 하늘로 날아 올라가지 않았다. 1992년 10월 28일, 쇼로 끝난 다미선교회의 휴거 소동이다.

아마겟돈(Armageddon)은 원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요한계시록에 ‘그들이 히브리 말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에 왕들을 모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곳에서 신과 악마가 최후의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종말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에는 2012년이다. 유카탄 반도에서 출토된 마야 달력이 그 무렵 지구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 자기장이 역전돼 생태계 혼란이 온다거나, 지구-태양-은하계가 나란히 배열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혜성과의 충돌이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도 빠지지 않는다. 그의 기록을 재해석해 보니 지구 멸망이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으로 예언했다는 것이다.

물론 겁낼 필요는 없다. 당분간 지구에 접근하는 큰 혜성은 없다. 은하계 내부의 지구가 태양·은하계와 나란히 정렬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게 과학계의 해명이다. 그런데도 세상이 뒤숭숭해지면 종말론이 기승을 부린다. 그만큼 삶이 고단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 금융시장의 혼란이 좀체 진정되지 않고 식량 쇼크까지 겹친 상황이다.

세계는 지금 적도 부근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피어오르는 비구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이 적란운이 다음달 하순부터 계절풍을 타고 아시아와 인도 대륙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11억 명이 먹고사는 벼가 자란다. 풍년이냐 흉년이냐에 따라 쌀 생산량은 30%나 차이가 난다. 최근 국제농업연구자문단(CGIAR)이 내놓은 예측은 밝지 않다. 지구온난화로 가뭄 지역의 강수량은 자꾸 줄고, 열대 몬순 지역의 홍수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세계 곡물 재고량은 30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국제 쌀값은 두 배나 올랐고, 곳곳에서 사재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곡물 생산이 줄면 못 사는 나라, 가난한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이 돌아간다. 만성적인 쌀 수입국인 북한·필리핀·인도네시아에 대기근이 닥칠 수도 있다. 지금은 4년 뒤의 아마겟돈보다 두 달 후의 기우제가 더 급할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적도 부근에서 발달한 적란운이 제대로 계절풍을 타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고대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