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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1.유럽외교와 관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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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방랑벽이 심했던 아버지의 영향탓이었는지 이박사는 여행을 몹시즐겼다.1930년대까지 그는 태평양을 세번,그리고 대서양을 한번 횡단했고 또 기차로 시베리아를 통과한 일도 있다.그는 미국은 물론 일본.중국.필리핀등 아시아 여러나라와 과테말라.엘살바도르.니콰라과.쿠바등 중남미 제국의 주요도시를 두루 돌아본 경험이 있다.그러나 그때까지 세계외교및 관광산업의 중심지인 유럽에는 깊숙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1933년초에야 그는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國際聯盟)회의에 참관함으로써「하와이 촌티」를 벗었다.
이승만이 제네바를 찾아가게된 것은 1931년9월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만주(滿洲)침략을 규탄하는 국제회의가 1933년초에 국제연맹본부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이 회의야말로 한국독립문제를 다시 한번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 는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제네바행을 서둘렀다.그는 美국무장관 스팀슨이 서명한 「외교관 여권」을 얻어 1932년12월23일 뉴욕을 떠났다. 1933년1월4일 제네바에 도착한 그는 「호텔 드 루시」에 여장을 풀고 파리의 「한국대표부」에서 일하고 있던 서영해(徐嶺海)의 도움을 받아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한 중국대표단(顔惠慶.郭泰祺.顧維鈞.胡世澤)과 제휴,그들과 함께 일본의 대륙침략을지탄.공격하는 외교활동을 폈다.이때 이승만이 추구한 목표는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케해 그 회원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중국을 위시한 각국 대표들이 이 회의에서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를 꺼렸 기 때문에 이승만은 일제가 급조한 만주국(滿洲國)의 괴뢰성을 폭로하고 만주에 사는 「1백만」한인의 자율권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춘 외교를 폈다.2월8일 그는 한국인의 주장을 담은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대표들과 세계 주요언론사 기자들에게 배포했다.제네바에서 그는세계굴지의 외교관및 언론인과 폭넓게 교제하면서 동양평화의 담보로 한국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이승만의 이같은 개인외교는 2월24일 국제연맹 본회의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한 내용의 「리튼 보고 서」를 채택하고 이어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케 하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후 이승만은 제네바 주재 미국총영사(길버트)및 중국 상주대표(胡世澤)와 만나 앞으로 미국.중국.한국이소련과 합세해 일본의 대륙팽창을 응징하자는 복안을 제시,그들의찬성을 얻었다.그는 이 4국 항일연대안(抗日連 帶案)을 구현하기 위해 파리에서 러시아 입국비자를 얻고(6월27일)빈으로 향했다.빈에 도착한 그는 중국대리공사(董德乾)의 소개로 소련공사페테루스키를 만나 자신의 구상을 토로했다.페테루스키는 이승만의계획에 적극 찬성,본국 정부에 주선을 약속했다.
이승만은 원대한 포부를 품고 7월19일 오전9시30분 모스크바에 도착해 크렘린宮 건너편「뉴 모스코 호텔」에 투숙했다.그러나 그날 저녁 그는 뜻밖에 소련 외무부가 보낸 사자(使者)로부터 출국명령을 받았다.러시아 외무부는 이승만에게 발급한 비자가「착오」였다고 하면서 사과표시와 함께 퇴거를 요구했다.소련 외무부가 갑자기 이러한 행동을 취한 이유는 당시 소련으로부터 (만주)동청철도(東淸鐵道)를 매입하려고 모스크바에 도착해 있던 일본협상단이 이승만의 밀행을 탐지하고 그의 추출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이승만은 7월20일 오후11시-즉 도착후 37시간30분만-에 모스크바를 황급히 떠났다.이로써 그가 구상했던 미.중.소.한 4국의 항일연대안은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끝났다.
제네바.모스크바등지에서 눈부신 독립외교를 펼치던 이승만은 틈틈이 짬을 내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역방,명승지와 고적(古蹟)을 관광했다.제네바에 머무를때 그는 파리와 런던을 방문,그곳의역사유적을 관광했다.모스크바를 다녀올때 두번 빈 을 방문해 빈근처의 명승지와 고적을 둘러보았고, 또 부다페스트도 관광했다.
구라파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탈리아로 여행해 밀라노.프로방스.로마.제노바.니스 그리고 모나코 등지를 두루 유람했다.유럽 체재때 이승만은 20 여년전 서울에서 가르쳤던 제자 이한호(李漢浩)와 상봉하는 행운을 얻어 그의 안내로 스위스의 명승지를 구석구석 유람할 수 있었다.
***제자 이한호와 극적상봉 세계적 하키선수로 스위스 여성과결혼한 이한호는 취리히에서 유도(柔道)사범으로 생계를 이어가고있었다.3월초에 독일어신문을 통해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알게 된그는 자기 동서인 건축가 뮐러 부부와 함께 이승만을 극진히 모셨다.이한호 를 만나기전에 이승만은 스위스 로잔대학을 방문,그곳에 유학하고 있는 미국 여학생 메리암을 찾아내 로잔 근교의 호반에서 산책을 즐긴 일이 있다.이승만은 메리암과 그의 친구 브라운을 2월21일 제네바로 초청,그들과 함께 국제연맹 본회의개막식을 참관했다.4월초에 그들은 몽트뢰 근처「로셰 드 나이」에서 개최된 춘계 스키경기대회를 같이 구경하기로 했다.이승만이장차 자신의 배우자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를 「호텔 드 루시」에서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메리암을 두번째로 만 나고 헤어졌던 2월21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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