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2>“당장 수염 깎고 오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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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25면

#장면1=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 미라지에서 열린 LPGA투어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3라운드. 갑자기 복통이 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은 후반 홀에선 배를 감싸쥐고 필드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매 홀 그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화면에 비쳤다. 그래도 소렌스탐은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타수를 까먹는다 해도 기권하는 것보다 낫다는 굳은 의지가 샷마다 묻어났다. 이날 성적은 1오버파 73타. 전날까지 공동 3위권에 있었던 소렌스탐으로선 아쉬운 하루였다.

#장면2=지난해 6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열린 LPGA투어 긴 트리뷰트 오픈 1라운드. 미셸 위는 16번째 홀까지 14오버파를 기록하고 있었다. 마지막 2개 홀을 남겨둔 상황에서 미셸 위는 갑자기 손목이 아프다며 짐을 꾸렸다.

정규 대회에서 88타 이상을 기록하면 남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LPGA투어의 규정을 의식한 ‘꼼수’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손목 부상을 이유로 기권해 놓고 며칠 만에 LPGA챔피언십 프로암에 출전했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긴 트리뷰트는 소렌스탐이 주최한 대회였다.

#장면3=2006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골프스쿨 PGCC의 프레시맨(1학년) 교실. 첫 수업부터 20대의 멕시코 청년 안토니오 리얀테가 그만 지각을 했다. 그는 “길을 잘못 들어 수업에 늦었다”며 공손히 사과한 뒤 서둘러 빈자리로 향했다. 서머빌 학장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미스터 리얀테, 학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았나 보군요. 우리 학교에선 수염을 길러선 안 됩니다.” 서머빌 학장은 사람을 시켜 일회용 면도기를 가져오게 하더니 그에게 건넸다. “당장 수염을 깎고 오세요. 아니면 교실에서 나가든지.” 결국 그는 10분 만에 수염을 깔끔하게 밀고 돌아왔고, 그 후로 리얀테의 탐스러운 수염을 본 사람은 없었다.

멕시코 청년 리얀테의 수염 이야기를 불쑥 꺼낸 것은 매너와 규칙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머빌 학장이 PGCC 신입생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마음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골프 전문스쿨 PGCC의 학칙은 엄격하다. 수염을 길러선 안 되고, 실기수업 때 반바지 착용도 금지한다.

매주 금요일엔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교복을 입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명문화된 처벌 규정은 없다. 학생들은 학칙이 너무 엄격하다며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교칙을 잘 따른다. 매너는 골프의 기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골프규칙 제1장을 읽어 보라. ‘예의를 지키며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는 게 골프의 기본정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골퍼들이 코스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듯 학교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일종의 로컬 룰인 셈인데 이 정도 규칙을 따르지 못한다면 골퍼가 될 자격이 없다.” 서머빌 학장의 말이다.

다시 소렌스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소렌스탐은 경기 후 “기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라운드였다”고 말했다. 그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 것은 골프라는 게임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관중에 대해 매너를 지키겠다는 의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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