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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선량들의 이남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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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년 전 이맘때다. 남한의 문화재 전문가들과 함께 평양의 고구려 고분벽화를 둘러보았다. 그때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낙지다. 식당에서 낙지를 시키면 어김없이 오징어가 나왔다. 남북한의 말이 다른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재미있기도, 헷갈리기도 했다.

국립국어원 조남호 연구부장의 해석은 이렇다. “북한의 낙지는 오징어의 방언이다. 북한에는 뻘이 많지 않아 낙지가 드물다. 북한에도 오징어가 있는데 우리의 갑오징어와 비슷하다.” 그는 남한의 한 무역상이 북한에 낙지를 주문했으나 막상 받은 건 오징어라 사업을 망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최근 『한국언어지도』(태학사)가 발간됐다.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 전광현 단국대 명예교수 등 국어학자 5명이 30년간의 작업 끝에 한국(남한)의 방언을 컬러지도로 정리했다. 153개의 표준어와 지역별 방언을 표기했다.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예컨대 고구마. 오징어·낙지와 비슷한 유형이다. 대다수 지역에선 고구마(고구미·고고마)인데, 전남·제주에선 고구마를 감자(감재·감저)로 불렀다. ‘감자’ 지역에선 진짜 감자를 북감자·하지감자라고 했다. 고구마의 분포도는 단순한 편이다. 상당수 단어들은 행정구역, 영·호남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언어의 영토 게임이 각양각색이다. 거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우리네 삶, 역사의 다양한 양태를 압축한 듯하다.

한국인의 식량원인 벼(이삭의 열매)는 남북으로 양분됐다. 경기·강원·충청에선 ‘벼’가, 호남·영남에선 ‘나락’이 쓰였다. 중부방언권과 남부방언권이 선명하게 갈라졌다. 반면 못자리는 동과 서로 나뉘었다. 경기·충남·호남에선 못자리가, 강원·충북·영남에선 모자리가 우세했다.

부엌은 어떤가. 북서쪽(경기·충청·강원북부·전북서부)에선 ‘부엌’이, 남동쪽(영남·전남·강원북부)에선 ‘정지’가 힘이 셌다. ‘부엌’ 지역에선 아궁이를 쓴 반면 ‘정지’ 지역에선 아궁이를 ‘부엌(석)’으로 불렀다. 그런데 부뚜막은 전남(부수막)을 제외한 전국을 아울렀다. ‘이웃사촌’ 단어인데도 정작 분포도는 그렇게 판이했다.

세력균형이 뚜렷한 말은 부추다. 부추(경기·강원), 솔(호남), 정구지(영남)의 3각 구도다. 어원이 전혀 다른 세 단어가 정립(鼎立)한 모양새다. 하지만 소꿉질은 통굽질·종곱질·동두깨비·반두깨미·바꿈살이·새금박질 등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어지럽게 세분됐다. 우리말은 국토를 가로로, 세로로, 빗금으로, 또 불규칙하게 가르며 진화해온 것이다.

『한국언어지도』의 방언분포도를 보며 18대 총선을 돌아봤다. 행정구역별로 확연하게 나뉜 정당별 지지도가 쓸쓸하기만 했다. 일부에서는 지역주의의 부활을 우려했다. 실제로 많은 후보자들은 ‘과거의 망령’인 지역주의에 호소하기도 했다. 우리의 언어는 오래전에 지역주의를 넘어섰는데, 소위 선진화 시대의 정치는 되레 후진 기어를 넣은 듯했다.

용어도 혼란스러웠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노무현 정부가 ‘좌파’로 규정됐고, 물가관리 52개 품목을 지정한 이명박 정부는 ‘우파’로 분류됐다. ‘잃어버린 10년’ ‘일당독재 저지’ 등 수사(修辭)도 요동쳤다. 요즘 유행하는 TV 리얼리티 쇼에 ‘리얼리티(현실)’가 없고 대신 ‘수퍼리얼리티(초현실)’가 판치듯 정치판의 언어사전을 따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

9일 선량(選良) 299명이 새로 뽑혔다. 그들에게 ‘이남박’을 하나씩 권한다. 이남박은 남박·함지박·함박·쌀름박 등 잡다한 사투리로 분화했지만 말 뿌리인 ‘박(바가지)’은 한결같이 공유했다. 방언 가운데 보기 드문 사례다. 계파·지역·이념은 다르더라도 ‘박’(유권자)을 잊지 않는 진짜 머슴들을 기대한다. 그들이 너나없이 주창한 민생을 새 박에 가득 담을 일이다.

박정호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