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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38. 뉴욕을 향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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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뉴욕 번화가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라스베이거스에 온 지도 1년이 넘었다. 1년 이상 장기 공연했던 ‘플라워 드럼 송’도 막을 내렸다. 라운지 가수로 단조롭게 지내고 있을 무렵 뉴욕에 갈 기회가 생겼다. 전위 예술가들의 거주지로 유명한 그리니치 빌리지의 ‘리빙 룸(Living Room)’ 클럽으로 공연을 하러 가게 됐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등 맨해튼을 중심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과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라스베이거스가 유흥과 휴가의 도시라면 뉴욕은 비즈니스를 비롯해 모든 분야의 전문가를 위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답게 헐렁하고 편안한 캐주얼 웨어를 입은 사람들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어슬렁거리는 곳이 라스베이거스라면 깔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절도 있게 걷는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 뉴욕이었다.

“뉴욕으로 와야겠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뮤지컬 본고장인 뉴욕으로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그때부터 내 머리 속은 온통 뉴욕으로 가득 찼다. 오로지 뉴욕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밥 맥 맥켄스에게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밥! 나는 뉴욕에 가고 싶어요! 뉴욕에 가서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 뒤에도 ‘자니 카슨 투나잇 쇼’ ‘마이크 더글라스 쇼’ 등에 출연하기 위해 몇 차례 뉴욕에 다녀왔다. 그사이 미국 생활에 익숙해졌고, 뉴욕에 가고 싶다는 욕구는 점점 커졌다. 그러나 마음 먹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도 메인 쇼 무대에 서보지 못한 동양 여자가수가 아니었던가.

그 즈음 ‘플라워 드럼 송’의 애틀랜틱 시티 공연이 결정돼 3개월 계약으로 그곳에 가게 됐다. 애틀랜틱 시티는 뉴욕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리며 라스베이거스처럼 도박장이 많은 도시였다.

‘플라워 드럼 송’ 공연장은 유명한 ‘파이브 헌드레드 클럽(500 Club)’이었다. 그 클럽의 소유주이며 운영자이던 폴 디아마토와 상당히 친해졌다. 이탈리아계인 그는 아주 큰 키와 깡마른 체구 때문에 ‘스키니(Skinny)’라고 불렸다. 애틀랜틱 시티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걸쳐 아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스키니는 다른 배우·가수보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어수룩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나를 어린 여동생이나 조카처럼 챙겨주었다. 특히 미국에 유학 와서 함께 살고 있던 여동생 영숙이도 나만큼 귀여워해줬다. 아마도 아직 미국이라는 세상에서 때 묻지 않은 우리 자매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어쩌면 스키니가 뉴욕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에게도 뉴욕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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