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시시각각

박근혜와 소포클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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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나라당은 170석을 얻을 수 있다. 150석이 안 될 수도 있다. 이틀 후 다시 역사는 만들어질 것이다. 어떻게 끝나든 18대 총선은 불멸의 교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것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20일 한나라당 경선. 박근혜 후보는 깨끗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이명박 후보는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가 정권을 되찾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권을 되찾는 일은 그러나 평탄하지 않았다. 11월 이 후보는 위기에 빠졌다. BBK 먹구름은 가시지 않는 데다 이회창 전 총재가 출마한 것이다. 이 전 총재는 보수 표를 뺏어가면서 박근혜 전 대표도 끌어당기려 했다. 이 후보는 11월 11일 기자회견을 했다. “정권 창출 이후에도 주요한 국정 현안을 협의하는 정치적 파트너로서, 소중한 동반자로서 (박 전 대표와) 함께 나가겠다.” 이튿날 삼성동 자택 앞에서 박 전 대표는 입을 열었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11월 30일 오전 전남 무안군 해제면 면사무소 앞 장터.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7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박 전 대표는 이명박이라는 이름을 세 번 거론하며 표를 호소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박 전 대표는 13개 시·도를 돌았다. 투표를 사흘 앞둔 12월 16일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말하는 이명박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회창 후보는 투표일까지 세 번이나 박 전 대표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집권하면 박 전 대표와 공동정부를 구성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문을 열지 않았다. 끝내 이회창 태풍은 없었고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해는 바뀌어 2008년이 됐다. 총선 공천이 다가오면서 박근혜 캠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소중한 국정 동반자’는 사그라지고 ‘물갈이’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박 전 대표가 결심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이명박 당선인은 1월 24일 중국특사로 다녀온 박 전 대표를 만났다. “공정하게 공천한다”는 합의가 나왔다. 이 당선인은 이방호 당 사무총장에게 “박 전 대표 측이 요구하는 내용 중 수용할 수 있는 건 적극적으로 수용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박근혜 파는 무더기로 탈락했다. 이명박 파는 정치보복은 없다고 하지만 내부 목소리조차 다르다. 이명박 후보 경선 공동 선대위원장이었던 김덕룡 의원은 “박 전 대표를 섭섭하게 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한다. 박근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했다. 탈락자들은 박근혜의 얼굴을 창처럼 치켜들고 싸우고 있다.

이들이 얼마나 살아 돌아올지 나는 모른다. 이들이 살아 와도 한나라당은 과반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과반에 모자라 이들과 합치거나 연대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박근혜의 파워가 얼마나 살아날지 나는 모른다. 박근혜의 미래에 대해서도 나는 모른다. 많은 이가 말한다. “박근혜의 시대는 갔다. 정몽준·이재오·오세훈·김문수, 그리고 다른 장수들이 있다. 박근혜는 지난 대선이 마지막 기회였다.” 다른 많은 이도 말한다. “박근혜는 끝나지 않았다. 미래가 박근혜를 기다리고 있다. 박근혜가 약속과 원칙을 지키는 한 지지자들이 그를 지킨다.” 어느 말이 맞는지 나는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근혜가 보여준 약속의 정치다. 근육형 인간들이 우글대는 정글에서 그녀는 심장형 인간이 강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BC 496~BC 406)는 “나는 여자의 맹세는 물 위에 적는다”고 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지난해 경선 때 상도동계 측근들에게 “여자가 무슨…”이라고 했다고 한다. 적어도 약속과 원칙에 관한 한 소포클레스와 YS는 박근혜에게 사과해야 한다. 2008년 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장한 남자들이 약속을 지킨 51㎏의 여자에게 쩔쩔매고 있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