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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거를 재미없다 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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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치부 기자로서 겪는 총선이 이번으로 네 번째다. 한국 정치가 워낙 역동적이다 보니 웬만한 데는 안 놀란다. 그런데 18대 총선은 내 정치적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만큼 예측불허가 많다. 야당인 통합민주당이 표를 달라는 방법이 그중 하나다.

민주당은 위기다. 위기도 보통 위기가 아니다. 4년 전 152석을 얻었던 당의 후신(後身)이 지금은 다른 야당들과 합쳐 개헌 저지선인 100석만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사정이 됐다. 등을 떠밀렸지만 당 대표와 직전 대선 후보가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지역구 선거에 뛰어들어야 할 정도다. 대선에서 형편없이 진 지 네 달도 안 돼 치르는 선거다.

그래서 나라면 절박하겠다. 절박하다 못해 국민들에게 “제발 잘못했고, 앞으로 잘할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겠다. 견제론 같은 주장은 국민들이 “그만하면 됐다”고 반성과 읍소에 마음이 흔들린 뒤에야 꺼내겠다. 그게 내가 그려본 수순이었다. 4년 전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도 그런 순서로 선거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수순은 달랐다. 처음부터 “한나라당이 압승하면 일당 독주, 일당 독재의 시대가 온다”고 외치고 있다.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국정을 운영했던 세력들이 아직도 주축인 민주당이다. 그런 그들이 반성했는지 조차 헛갈린 상황에서 ‘안 찍으면 이런 일이 생길 테니 알아서 하라’는 투로 견제론만 무성하다. 유세 차 위에서 지원유세를 온 사람들과 후보가 어울려 춤추는 장면도 생각 밖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춤은 운동원들이면 족하다. 춤은 민주당이 처한 절박감과 어울리지 않는다. 춤추는 사람들의 표정이 흥겨움과 거리가 멀다는 게 결정적 흠이다.

여당도 개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의 공천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양산했다. 그들의 공천을 시중에선 ‘총기 난사 공천’이라고 부른다. 33명의 사상자를 낸 지난해 4월 미국의 버지니아테크 사건에서 따왔다고 한다. 캄캄한 밀실에 의원들을 가둬놓고 머리가 희끗희끗하면 무작정 낙천이란 총알을 난사했다는 거다. 밀실에 아예 들어가지도 않은 정보 빠른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와 함께.

공천 후유증은 ‘친박연대’를 탄생시켰다. 한국 정치를 30여 년간 호령한 3김 시대에도 당명에 사람의 성이나 이름을 넣을 생각은 못했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출마한 대구 달성 유세에서 그의 좌우로 친박연대 후보와 한나라당 후보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18대 총선 희극의 절정이었다. 쇄도하는 지원 요청에 대한 박 전 대표와 측근들의 대처법-동영상을 이용한 지원유세-에 나는 허를 찔렸다. 오늘도 전국 곳곳에선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다”는 친박연대, 무소속연대의 구호가 유권자들을 심란하게 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4일 비장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이다. 그리고 충북 선대위원장에 임명했다. ‘친절한’ 근령씨는 “언니와 미리 상의하지 않았다”는 솔직함으로 이 비장의 카드가 노리고, 의도하는 게 뭔지를 사람들이 알게 했다.

지난 주말 정치에 관심 없는 비정치권 인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18대 총선에 스타 정치인도 없고, 보수-진보로 대표되는 이념의 대결도 없고, 딱 부러진 정책의 대결도 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 선거가 도통 재미가 없다고 했다.

정치가 재미없다는 말은 정치부 기자인 내겐 밥줄이 달린 문제다. 스타가 없고, 대결이 없다는 데는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재미가 없다는 부분에서 나는 반론을 폈다. 총선을 네 번째 지켜보는 나조차도 생각 못한 희한한 일이 이렇게 많은데 선거가 재미없다니….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