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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인간과 자연의 조화 꿈꾸는 별난 상상력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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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36면

1999년 뉴욕의 신문기자 웨스턴은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공식 허락을 받고 에코토피아를 방문한다. 워싱턴·오리건주, 그리고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이 80년 미합중국에서 탈퇴하여 독립국을 선포하고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 지 20년이 지난 뒤다. 옛날에는 유명한 도박 도시였으나 이제 국경 도시가 된 리노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그는 열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향한다. 열차 안 풍경부터가 벌써 예사롭지 않다.

어니스트 칼렌바크『에코토피아』

만들다 만 것처럼 부실해 보이는 객차에는 좌석이 아예 없고 바닥에 양탄자가 깔려 있
어 승객들은 대충 걸터앉아 대마초를 피우고 있다. 미국에서 떨어져 나온 뒤 이 나라는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후퇴한 것일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열차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자기부상 열차가 아닌가! 74년 시점에서 25년 후를 예상한 가상소설 『에코토피아』는 이렇게 시작된다.

에코토피아는 ‘에코(eco·환경)’와 ‘유토피아(utopia·이상국가)’를 합쳐 만든 이름 그대로 인간과 자연환경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라다. 이것은 미국 사회와 문화를 특징 짓는 생산 증가, 산업화, 지속적 진보의 역상(逆像)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가 과학기술을 전면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발전시켜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는 얼핏 보면 부조화와 모순이 가득하다. 니스 칠도 안 된 통나무 받침대 위에는 영상통화 전화기가 놓여 있다.

사람들은 완제품을 구입하기보다 반제품을 사다가 집에서 완성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예컨대 어촌에는 통나무로 차축을 만들고 차체는 전복 껍데기로 장식한 트럭들이 돌아다닌다. 사냥해 잡은 사슴을 둘러메고 버스에 올라탄 승객들은 주인공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자 심술궂게도 사슴 피를 주인공 얼굴에 문지르고는 깔깔거리며 웃어댄다.

에코토피아인은 문명의 파괴가 아니라 ‘창의적 재구조화’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정신적 지주였던 청교도적 노동 윤리를 거부했다. 근대 서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늘 강박적으로 일을 해야 했고 진보와 성장이 지상 목표였으며, 결국 이 목적을 위해 자연이 파괴되었다. 이런 파멸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코토피아는 미국에서 독립한 다음 농업 국유화, 석유산업 잠정 중단, 백화점 유통망 강제 통합, 엄격한 자연보호법 시행 같은 혁명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자 자본의 대규모 해외 이탈과 대량실업 사태가 일어났고 국내총생산(GDP)은 3분의 1 이상이나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경제적 재앙이 닥친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 이 나라 사람들은 실로 의연하게 대처한다. 경제적 재앙이 곧 인류의 생존에 대한 재앙은 아니라는 이들의 파격적인 주장은 우리도 한번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곧 새로운 국가 조직이 정비되어 에너지·지식·기술·물질 등 중요한 자원을 생존에 필요한 기본 필수품 부문에 쏟아 넣으면서 안정을 찾아갔고, 실업 문제는 노동 시간을 20시간으로 줄여 일거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처럼 위기 상황에서 고통을 함께하면서 오히려 단합이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체제를 유지하려면 인구학적·사회적 통제가 불가피하다. 이 나라에서는 인구 감소와 식량 감산이 공식 목표다. 자원과 동식물에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의 ‘녹색혁명’은 무리한 방식으로 식량 생산을 늘리고 그 결과 인구가 급증했다가 다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잃게 된 가장 끔찍한 사례에 속한다. 가족제도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 나라의 확대가족은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도 함께 살아가는 소규모 공동체의 의미가 강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부일처제를 위주로 하지만, 남녀의 성관계는 극히 자유롭다. 심지어 1년에 네 번(춘분·하지·추분·동지) 있는 국가 지정 공휴일에는 난교를 하는 관습도 있다.

『에코토피아』는 단순히 환경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그리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이전에 인간 사이의 관계부터 완전히 다르게 변모했다. 이 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특성은 무엇보다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마음을 옥죄는 온갖 억압에서 해방된 결과 툭하면 자신의 격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보자. 어느 날 주인공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자신의 계란 요리가 차갑게 식어 있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그러자 식당 안의 손님들과 웨이터가 모두 주방으로 몰려가 요리사와 논쟁을 벌인다. 그 요리사는 분명 깔끔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 날은 14가지 요리 주문이 한 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일이 밀릴 수밖에 없었고, 다른 요리사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는 설명이다. 요리사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손님 두 사람이 들어가 요리사를 달래고 안아준 다음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 일을 도와준다.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인간 대 인간으로 진솔하게 만나기 때문에 거침없이 말싸움을 벌이고 또 금세 친해지는 것이 일상사다. 미국이나 유럽 사회의 세련된 사람들처럼 익명성 뒤에 자신을 숨기고 알량한 상투적 친절로 위장하는 법이 없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 중 하나는 전쟁놀이 축제다. 에코토피아인은 실제 전쟁은 피하는 대신 그와 거의 유사한 정도의 집단 패싸움을 벌이며 논다. 창이 어깨를 꿰뚫어 부상한 사람이 생겨 나면 곧 구급차가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한다. 그렇지만 실제 위험은 그리 크지 않아 1년에 고작해야 50명 정도밖에 죽지 않는다고 설명한다(1년에 고속도로에서 죽는 사람이 7만5000명인 것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왜 이런 놀이를 하는 것일까? 분명 인간의 생물학적 체제 안에 육체적 경쟁욕이 내재해 있는 만큼 이것을 억지로 자제할 것이 아니라 적절히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웨스턴은 신문기자로서 이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하나씩 살펴본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때로는 반감이 앞서지만 차차 이 나라를 이해해 간다. 그가 결정적으로 태도를 바꾼 계기는 “다리 근육이 튼튼하고 강렬한 체취를 가진” 삼림관리 여성 노동자 마리사와 사랑에 빠진 일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가 가장 중요한 자원일 뿐 아니라 숲을 영성을 간직한 신성한 곳으로 보기 때문에 마리사는 이 나라의 철학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셈이다. 마리사의 삶은 분명 인디언 문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뉴욕 출신의 남자가 인디언의 생태철학을 구현하는 서부의 삼림관리인 여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국 문명의 핵심을 이루었던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앵글로색슨계 신교도 백인)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그것이 파괴했던 과거의 삶과 정신을 복구하는 상징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현대 문명의 핵심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대단히 급진적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너무나도 보수적인 측면이 곳곳에 잠재해 있다. 미국 동부 지역에 핵 지뢰를 몰래 매설하여 협박하는 것은 자신의 생태환경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핵 사막으로 만들어버려도 좋다는 극도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작품 속의 한 인물은 대기와 바다에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중국·일본·시베리아에 특공대를 보내 공장들을 박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래 자연보호주의는 깨끗하게 정화된 세계를 소수의 사람만 향유하려는 보수주의로 귀결될 위험을 안고 있다. 흑인 사회가 ‘그들 스스로 원해(!)’ 고립된 채 약간 다른 종류의 철학에 따라 살아간다는 설정은 이 작품의 보수적 성향이 인종주의와도 연결된다는 혐의를 살 만하다. 더 나아가 사람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언제나 국민을 감시하며 엄정하게 국가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정보부 직원들의 존재는 이 작품이 에코-파시즘으로 비판받는 요인이 된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정치적 신뢰의 파탄,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특히 심각한 자원문제, 베트남 전쟁 패전의 충격, 흑인과 인디언 같은 심각한 소수자 문제 등이 이 작품이 배태된 시대 배경을 이루고 있다. 45년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국 자본주의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당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또 다른 미국의 별난 상상이 흥미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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