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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년 제갈공명 보셨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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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08면

만화란 장르는 과장과 왜곡을 특징으로 한다. 누구나 좋아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깊어지는 『삼국지』의 세계는 천의무봉한 만화의 세계 안에서 가장 현란하게 변신한다. 최대한 원본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각색부터 인물의 재해석을 통해 주인공이 바뀐다거나 완전히 판타지로 나아가기도 하는 등 만화로 탈바꿈한 『삼국지』의 세계는 무한하다.

만화로 다시 태어난 『삼국지』

일단 아이들과도 함께 볼 수 있는 『삼국지』로는 『철인 28호』『바벨 2세』의 작가인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그린 『전략 삼국지』가 있다. 무려 60권 분량의 『전략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충실하게 만화로 옮겼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미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따분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가장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다. 이문열이 평역한 소설 『삼국지』를 이희재가 그린 『삼국지』도 정석을 따르고 있다. 『삼국지』를 당대의 풍경과 함께 스펙터클 하게 보고 싶다면 들춰볼 만하다.

하지만 기왕에 만화로 『삼국지』를 본다면 글로 읽은 『삼국지』와는 다른 맛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1978년 처음 연재되었던 고우영의 『삼국지』는 일본과 중국의 어떤 만화판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걸작이다. 고전의 독창적인 해석도 다채롭고, 『삼국지』에 등장하는 갖가지 에피소드와 교훈을 우리 사회에 빗대어 풍자하는 기교도 탁월하다. 일단 인물 해석부터가 흥미진진하다.

유비는 쪼다고, 제갈공명은 미소년이고, 조조는 두통에 시달리는 모사꾼이다. 주인공인 유비를 겁도 많고 약간 치사하기도 한 인물로 묘사하지만 그것이 유비라는 인물의 가치를 격하하는 것은 아니다. 고우영은 자신을 유비에 빗대면서 오히려 쪼다스러움이 아무것도 없었던 유비를 난세에 영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로 그려낸다. 가장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제갈공명과 관우를 라이벌로 대립시키는 것도 인상적이다.

관우를 조금씩 궁지로 몰아넣으며 제갈공명이 고뇌하는 모습은 공감이 간다. 세상은 꼭 선인과 악인만이 다투는 것은 아니다. 또한 권력 다툼에 일절 관심이 없는 장비와 조자룡의 개성도 매끈하게 잡아낸다. 장비의 서민적인 순수함을 부각하고, 조자룡의 올곧고 순수한 충성심을 따뜻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의 통념을 180도 뒤집는 경우는 없지만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명확하게 부여하여 생생함을 더해준다.

쓱쓱 빗질을 하는 것처럼 담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그림이 인상적인 고우영의 『삼국지』에서 더욱 돋보이는 것은 말재간이다. 고우영의 말재간은 단순한 말장난을 뛰어넘어 당대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조롱하는 해학이 있다. 초선의 미인계에 걸린 여포는 의부 동탁을 죽이면서 당시 유행했던 영화 ‘페드라’를 인용하여 ‘크레오 페드라’라고 외친다.

뛰어난 작가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캐릭터에 따라 말투와 어휘가 천양지차다. 유치한 장비와 고상한 관우의 대사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운율이 맞는다. 반면 제갈량과 관우의 대화는 정중하면서도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고우영의 『삼국지』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일지매』등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서도 고우영은 여느 작가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고전이나 역사를 각색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국내, 아니 세계에서도 단연 최고수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의 향기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아니 원작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전혀 새로운 작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바로 고우영의 만화다. 그런 고우영의 재능이 최고도로 발현된 작품이 바로 『삼국지』다.

고우영의 『삼국지』가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자신의 스타일로 재구성했다면 이학인 원작, 왕흔태 그림의 『창천항로』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우영의 『삼국지』에서 유비는 ‘병신·쪼다’로 묘사된다.

자기 혼자는 제대로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공명과 관우에게 매달리는 졸장부. 반면 제갈공명과 관우는 아주 멋있게, 천하의 영웅으로 그려놓았다. 그건 잘못이 아니다. 각색을 하면서 원작의 인물해석과 달리 자신의 관점에 따라, 사상에 따라 재해석하는 것은 마땅한 권리다.

나관중이 처음 『삼국지연의』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역사가들은 유비보다 조조를 뛰어난 영웅으로 본다. 하지만 나관중은 조조를 사악할 뿐 아니라 아주 야비한 졸장부로 그려놓았다. 조조를 왜곡해 그린 것은 한 나라를 정통으로 생각했던 나관중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는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한 하나의 ‘소설’일 뿐이다.

고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주인공이 바뀐다 해도 상관이 없다. 다만 주인공이 관우나 장비 혹은 여포가 아니라 유방이 된다면 문제가 있지만. 『창천항로』는 인물의 성격을 재해석하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주인공을 조조로 바꾸어버린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물론이고, 고우영의 『삼국지』에서도 조조는 간교하고 사악한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창천항로』의 조조는 총명하고, 용맹하고, 하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뛰어난 지략가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불의를 깨닫고 이 세상을 뜯어고치겠다며 나선 개혁가이기도 하다. 반면 유비는 우직할 뿐인 왕족의 후손으로 나온다.

『창천항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조만이, 혹은 그의 라이벌만이 영웅으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세상은 조조와 유비 둘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창천항로』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모두 영웅으로 그려낸다. 대표적으로 대부분의 영화나 만화에서도 망나니로 묘사되는 동탁과 여포가 있다.

그러나 『창천항로』의 동탁은 거구에 변발이 잘 어울리는 북쪽 기마민족의 수장이다. 중원의 한족이 보기에 그는 한없이 포악하고, 무례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인재들을 절차에 상관없이 발탁하고, 하늘의 뜻이 다르다면 맞대결해서라도 그 뜻을 가져오겠다는, 일본으로 보자면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인물이다.

여포는 원시적인 힘과 충동을 거부하지 않는, 사랑이건 전투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전사로 그려져 있다. 각자의 견해가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그들 모두가 영웅인 것이다. 『영웅 삼국지』라는 소설이 그러하듯이 『창천항로』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영웅 그 이상이다.

『창천항로』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동양판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개 신, 혹은 신과 인간의 자식이다. 그들은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실수도 저지르고, 때로 악행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다. 마찬가지다.

『창천항로』의 주인공은 모두 그들의 인간적인 개성이 어떻건 장대한 포부와 야망을 지니고 있는 천하의 영웅이다. 원래 『창천항로』의 스토리를 썼던 재일교포 이학인이 사망한 후 약간 느슨해졌다는 평도 있지만 영웅들의 웅장한 대결은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여전히 가슴을 끓게 한다. 고우영의 『삼국지』가 인간적이라면, 『창천항로』는 신화적인 느낌을 준다.

『삼국지』의 인물과 상황을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모든 것을 코믹하게 만들어버리는 만화들로는 『트러블 삼국지』와 『삼국전투기』가 있다. 『삼국지』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삼국지』를 즐거운 오락으로 즐길 수 있다. 정훈이의 『트러블 삼국지』는 조조·유비·손책 등의 영웅호걸이 펼치는 썰렁하면서도 순도 높은 개그를 보여준다.

인터넷 만화로 시작된 최훈의 『삼국전투기』는 등장인물들을 프로레슬링 선수나 록 뮤지션, 심지어 일본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의 캐릭터 등으로 자유롭게 바꾸어버린다. 패러디 정신에 충실하게 『삼국지』의 모든 것을 요절복통 상황으로 변모시키는 만화다.

『삼국지』를 독특한 판타지로 재구성한 만화도 있다. 야마하라 요시토의 『용랑전』은 일본의 고등학생이 삼국시대로 타임 슬립을 하여 전개되는 만화다. 『삼국지』의 세계를 기본으로 삼으면서도 역사적 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을 섞어 판타지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용랑전』이 『삼국지』의 기본설정을 지키는 것과 달리 시오자키 유지의 『일기당천』은 영웅호걸의 이름만을 빌려온다. 『삼국지』의 영웅호걸들이 현대에 환생하여 자웅을 겨룬다는 이야기인데, 무대는 학교이고 대부분의 인물이 여고생이다. 한마디로 글래머 미소녀들이 등장하여 화끈한 격투를 벌인다는 기상천외한 『삼국지』다. 『삼국지』가 연상되면서도 사실은 『삼국지』와 별 상관이 없는 만화.

이렇듯 기이한 만화까지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삼국지』의 세계가 광활하고 익숙하다는 것이다. 『삼국지』는 이미 『서유기』와 마찬가지로 중국만이 아니라 동양인 모두의 고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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