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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봄에 홀려 길을 걷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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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사계절 가운데 봄만 한 글자다.

어~ 하는 새 휙 지나간대서 이 짧은 이름이 붙었을까.

같은 뜻의 말이 딱 하나 있다.

‘꽃’역시 한 글자다. 여기엔 사랑스럽다, 귀엽다, 예쁘다, 아름답다, 부드럽다, 그윽하다, 포근하다, 미치겠다, 보고 싶다, 그립다, 눈물이 난다 … 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뜻이 담겨 있다. 꽃 보러 가는 길은 봄맞이 가는 길이다. 저 많은 뜻 중에 나만의 의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남풍에 실려와 꽃잎에 묻혀 툭 떨어지는 봄, 오는 건 더디고 가는 건 잠깐이다. 꽃구경 한 번 못한다면 봄은 얼마나 허망한가.

이번 주 week& 테마는 ‘봄 길’이다. 쏟아지는 볕에 몸을 맡기고 휘이 훠이 걷는 봄 길.

지난 토요일 서해의 한 섬에 다녀왔다.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할 만한 색다른 섬이다. ‘걷기의 마법’에 홀린 야생화동호회원들과 함께였다. 꽃은 절정이었다. (안산 풍도)

글=안충기 기자,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1 가야지. 엄마의 한마디에 준희(12)는 눈을 반짝 떴다. 오늘은 ‘놀토’, 컴퓨터 게임 한껏 할 수 있지만 그보다 신나는 일이 있다. 엄마·아빠·고모와 가는 꽃구경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 지난해부터 꽃을 보러 다녔다.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과 고려산, 서해의 구봉도·영흥도·무의도·작약도, 경기도의 천마산·유명산, 강원도의 금대봉과 함백산에도 가 봤다. 우리나라의 수목원은 거의 다 다녀왔다. 인터넷에 만든 ‘가족사랑들꽃사랑’ 카페에서 할아버지네와 고모네와 꽃 얘기를 주고받는다.

서울 봉천동 집을 나선 오전 여섯 시, 바람이 달콤하다.

2 ‘공수거’ 백영찬(58)씨는 부산에 산다. 들에서 꽃을 만나고 산에서 사람 만나는 재미에 틈만 나면 집을 나선다. 지난주에는 노랑앉은부채를 보러 천마산에 다녀왔다. 남쪽에서는 볼 수 없어 손꼽아 기다리던 귀한 꽃이다. 산 아래 모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변산바람꽃이 무더기로 피는 섬에 가려고 이번 주에도 먼 길을 왔다. 서울의 딸네 집에서 자고 새벽같이 나왔다. 5년째 가는 섬이지만 여전히 맘이 설렌다. 손에 든 박스가 묵직하다. 함께 가는 회원들과 나눠먹을 딸기다. 빈손으로 오는 적이 없다고, 회원들은 ‘공수거(空手去)’일지는 몰라도 ‘공수래(空手來)’는 아니라고 농담을 한다.

인천 남항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반긴다.

3 최주희(26)씨와 고윤경(27)씨는 지금 DSLR의 매력에 폭 빠져 있다. 꽃이 좋아서 지난해 인터넷 카페 ‘들꽃i’ 회원이 됐다. 야생화를 아끼는 경기도 내 초등학교 교사들의 모임이다. 이맘때면 수시로 꽃을 찍으러 다닌다. 모임에서는 소중한 우리 꽃을 아이들과 나누려고 2004년부터 전시회를 연다. 회원들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동료 선생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오늘은 이 봄 첫 출사다. 그 섬은 꽃 천지란다. 오전 3시30분에 일어나 남쪽을 향해 달렸다.

충청남도 서산시 삼길포항에서 배에 올랐다.

4 어느 날 자신의 블로그 ‘부용의 야생화사랑’을 열어보고 박승자(64)씨는 깜짝 놀랐다. 하루 만에 1만 명이 넘게 다녀간 것 아닌가. 혼자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신기했다. 나전칠기에 매여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던 일이다. 오전 2시30분에 길을 나서 영하 26도의 태백산에 오른 적도 있다. 구봉도·천마산·수리산…. 이번 주엔 나흘 내리 새벽에 집을 나섰다. 2년도 안 돼 거의 1000건의 사진과 글을 올렸다.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지만 힘들지 않다. 참 예쁘구나, 너희들 덕분에 난 행복해. 꽃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음이 통한다. 맑은 공기 마시니 마음이 맑아졌다. 산길 많이 걸으니 몸도 튼튼해졌다. 멀리 보고 꼼꼼히 살피니 눈까지 좋아졌다. 사서 고생 왜 하느냐던 남편이 이제는 문자로 응원까지 보낸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던 두 아들 내외도 팬이 됐다.

서울 서초동의 집에서 인천으로 가는 길, 남편이 양재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5 2001년에 인터넷 카페 ‘꽃향기 많은 집’을 열었을 때 최요환(52)씨는 회원이 만 명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초등학생 회원도 천여 명이다. 어려서부터 카메라를 만졌다. 신혼 때 장비 일체를 도둑맞지 않았다면 사진 생활을 계속했을 것이다. 직장에 매여, 크는 아이들 챙기며 멀어졌지만 잊을 수는 없었다. 97년 중고 카메라를 샀다. 꽃을 렌즈에 담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카페 관리를 도맡다시피 하는 아내와 열성회원들이 고맙다. 회원들과 출사 나갈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자연 훼손이다. 탐사 안내문을 보낼 때는 ‘돌 한 개 풀 한 포기라도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남겨두고 오겠다’는 문구를 꼭 넣는다. 괜한 엄포가 아니다. 처녀치마를 찍고서 배낭에 숨겨온 사람을 카페에서 제명한 적도 있다. 일찌감치 인천 남항부두에 나왔다. 공수거·늘향·솔베이지·비타민·소하·맥·겨울아이·주이·한터…. 익숙한 얼굴들이 속속 도착한다.

오늘은 회원들과 풍도에 가는 날이다.

6 풍도에 사람들이 모였다. 인천 남항을 떠난 99인승 라이온스호는 2시간을 달려 선착장에 닿았다. 영흥도 진두선착장, 서산 삼길포항, 당진 대산항에서도 배가 들어왔다. 다른 배를 타고 온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다. ‘꽃향기 많은 집’ ‘야생화 사랑’ ‘풀꽃나라’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왔다 갔다 하며 알게 된 사이들이다. 손에 든 카메라를 빼고는 차림새도 성별도 나이도 다 다르다. 박정자씨가 말한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요 하나같이 순하고 섬세해요. 남자들도 다 맘이 고와요. 산에 다니니 술 마실 시간이 없고, 담배도 안 피우니까 그렇지요.

7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는 식구가 다섯이다. 1·3·4학년 여학생 셋에 선생님이 둘이다. 올해 입학한 다예는 이 섬의 파출소(경기도 안산시 단원경찰서 풍도 분소)에서 홀로 근무하는 임유정 경장의 딸이다. 동네아저씨와 오토바이를 고치던 임 경장이 손님 왔다고 커피를 타냈다. 김계환 이장은 섬에 오는 사람들에게 1000원씩 받는 이유를 조심스레 설명했다. 작은 섬에 논 한 평 없어요. 조그만 밭뙈기 외에는 수입원이 없지요. 57가구 중 노인가구가 80%예요. 청소비 조로 받는데…. 꽃 보러 오는 이들을 성가셔하기엔 섬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24척의 배 중 조금 큰 4척만 고기잡이를 나간다. 카메라 든 사람들이 들어오던 날 섬사람들은 동네잔치가 있어 인천에 나가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다 친척이고 인척이다. 500년 넘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마을을 지키며 바다를 내려다본다.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아직 가지에 그대로인데 잘 생긴 해송 숲엔 푸른빛이 싱그럽다. 수북한 덤불을 헤치고 고개 내민 쑥이 소복하다. 꿩의바람꽃 흐드러진 비탈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나물을 뜯는다.

그리고 몇 가지

▶1894년 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고승호가 일본 군함의 포탄을 맞고 가라앉았다. 1100명의 청나라 병사가 탄 배였다. 청일전쟁의 서곡이었다. 섬의 후망산 꼭대기에는 일본이 승리의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아있었다.

▶하루 한 차례 배가 다닌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오전 9시30분에 떠나는 제3왕경호는 손님들을 내려주고 돌아 나온다. 왕복 2만3800원. 배를 빌려가지 않으면 민박을 해야 한다. 이장댁 032-833-0415.

▶가는 길 오른쪽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는 팔미도가 보인다. 건설 중인 영종대교의 웅장한 교각 아래로 배가 지나간다.

▶오고 가는 배를 갈매기들이 따라 난다. 뭍의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매기들은 여전히 새우깡을 탐한다.

▶‘꽃향기 많은 집’ 식구들이 섬에 선물을 전했다. 경로당에는 어른들의 간식을 넣고, 가구마다 식용유 세트를 돌렸다. 임 경장은 최요환씨가 찍은 풍도 꽃사진 액자를 받고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민박집 ‘풍도랜드’(032-831-0596)에서 차려낸 밥상은 봄상이다. 뒷산에서 캐온 향 진한 달래, 생굴 넣은 무생채, 조개젓, 간재미 무침, 우럭 매운탕 앞에서 모두들 체면을 버렸다.

▶수줍어하며 말끝을 흐리던 준희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경계를 풀었다. 작은 카메라에 담아온 꽃들의 이름을 물으니 변산바람꽃 · 제비꽃 · 복수초 · 풍도대극… 술술 답했다. 배에 내려서는 안녕히 가세요, 하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돌아오는 길, 바다에서부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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