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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 보수 더 비참해질까 두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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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 한나라당 공천심사는 명백한 정치행위… 이제는 뜻 없다
■ 굉장히 조심하지 않으면 총선 과반 의석 얻기 쉽지 않은 상황
■ 영어 활성화 필요성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 인식해야
■ 미국 움직이는 거대한 중산층의 실체, 그것이 너무 궁금하다
■ 적화 위기 벗어나려면 자유민주세력 진짜 건강성 찾아야 한다

▶이문열
1948년 경북 영양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 중퇴
1977년 <매일신보> 신춘문예 소설 <나자레를 아십니까> 입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새하곡> 당선 문단 데뷔
1979년 <사람의 아들>로 제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2년 <금시조>로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
19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
1992년 <시인>으로 제37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2년 제24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수훈
1998년 2월 미국 출판 에이전시 뉴욕와일리(WYLIE)사와 전속계약
2003년 12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월간중앙 한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우리나라 보수의 버팀목이었던 이문열. 그가 한국에서, 또 미국 보스턴에서 준엄하게 일갈했다. 보수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진보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비판으로… 그가 <월간중앙> 창간 40년 기념호에 던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국에 두 달 머무르는 동안 선명하게 입장이 정리됐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모호했던 것들이, 요 한두 달 새 명확해진 것 같아요.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도 명확하게 됐고-. 앞으로의 10년은 지난 10년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사람이 청광스러운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여기 있는 게 잔칫집 차일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더군요. 한 상 받으려고 기다리고 앉은 것처럼 보일까봐.”

우리 사회 대표적 ‘보수 논객’, 소설가 이문열 (60)이 한국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현재 보스턴에서 머무르는 그는 지난해 연말 ‘시대의 아이들과의 불화’를 피해 새롭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고전을 다시 읽으며 쓴 작품인 <초한지> 출간에 맞춰 귀국했다. 그는 출국 날짜를 연거푸 늦추며 두 달 가까이 한국에서 머무르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0~90년대 그의 이름 석자는 일종의 문화권력이었다. 대중성과 인기에서 그와 견줄 만한 작가가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그의 이름은 문학이 아닌 문학외적 영역, 특히 정치판에서 더 자주 거론됐다. 더불어 그의 글 역시 문학이라기보다 정치행위로 읽혔다.

일부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했던 그의 신문 기고문은 좌익 혐오에 빠진 극우파의 우격다짐으로 치부됐으며, 그에게는 ‘보수 꼴통’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1년 10월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자신의 저서가 장례식을 당하는 이른바 ‘책 장례식’을 목도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100일 뒤 그의 책은 화장(火葬)과 풍장(風葬)을 함께 당했다.

누구 하나 선뜻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건(책 장례식)보다 침묵하는 동료 작가와 문단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2004년, 그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며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후폭풍으로 위기에 처했던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럴수록 그를 둘러싼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계속되는 ‘한국판 홍위병’들의 문화테러에 상처받고 권력화한 종북좌파세력의 교묘한 억압과 소외에 지친 그는 2005년 돌연 미국으로 떠나 지금까지 체류 중이다.

“부담 없이 문학의 길로 가게 돼 홀가분”

출국 이틀 전인 지난 2월18일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 ‘부악문원’에서 만난 그는 모처럼 활기차 있었다. 그리고 전화와 이메일로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간 그와 인터뷰를 이어갔다.

그가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여줬던 조심스러움은 찾기 어려웠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에 차 있었고, 그 동안 피하던 정치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의견을 밝혔다. 무엇보다 그는 편안해 보였다. 불과 두어 달 만에 생긴 변화였다.

허의도<월간중앙>으로서는 4년 묵은 숙제를 푸는 것 같습니다. 책을 내고 나서 기자를 만나는 것 말고는 그간 언론을 너무 기피하시는 바람에 속 깊은 발언을 담아낼 기회를 갖지 못했거든요. 아무튼,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문열 미국에 머무를 때 모호했던 것들 가운데 이번에 한국에 머무르는 두 달 동안 명확해진 것이 많았습니다. 처음 미국에 갈 때 내 정서는 솔직히 분노나 원한 같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얼마 지내다 보니 그게 차츰 후회나 반성 비슷한 기분으로 변해 가더군요. 실은 내가 뭔가 잘못한 것 아닌가 하는…. 하지만 그런 기분이 조금 비치기만 하면 그것을 무슨 대단한 투항선언처럼 과장해 보도하는 친(親)정부 매체들에 당한 경험 때문인지 한편으로는 그런 반성과 후회를 완강하게 부인하는 감정도 있고…. 그런데, 우선 그런 것들이 이 두 달 사이에 명확해졌고, 또 앞으로 내가 할 것도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허의도 어떤 방향으로 정리됐는지 털어놓을 수 있나요? 미국 체험도 많이 담길 것 같은데….

이문열 미국에 있는 동안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정치에 관여하고 특정 입장을 지원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쯤에서 손을 씻고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나라당의 대선의 승리가 이런 것을 명확하게 해줬죠. 더 이상 내 역할이 필요 없어졌으니까요. 만약 여기서 더 얼쩡거리면 지난 10년간 몇 대 얻어맞은 것을 무슨 큰 공적으로 내세우며 논공행상에 끼어들겠다는 모습으로 보일 테니, 이쯤에서 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죠. 예전에도 내가 정치적으로 의사표시를 할 때는 보수적 태도와 자유민주주의 가치 쪽을 많이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문학의 장을 뛰쳐나와 반대세력과 첨예하게 싸운 적은 없습니다. 이제는 돌아보기조차 싫은 이전투구 같은 싸움은 전부 지난 10년간 일어난 것입니다. 특히 한나라당 공천심사에 들어갔던 것은, 당시 나는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명백한 정치행위에 속하는 일이죠. 하지만 그때의 위기의식으로는 그런 형태로라도 보수세력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대선의 승리로 앞으로는 그런 극단한 감정에 휘말리는 것을 면하게 돼 나로서는 다행이죠. 지금은 아무 조건이나 전제 없이 평온하게 한 작가로서 다시 나갑니다. 그리고 돌아올 것이고요.”

허의도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것이, 당시 공천심사위원은 어떻게 맡으시게 된 것입니까?

이문열 많은 사람이 내가 심사위원장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더군요. 위원장은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였죠. 아마도 한나라당이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의미 있는 카드로 내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분위기 반전용이라고 할까? 처음 최병렬 대표님의 전화를 받고 사양했다가 며칠 후 이재오 사무총장이 다시 요청해 참여하게 됐습니다.

허의도 얼마 안 되는 기간이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소설가 이문열로서는 상당히 큰 피해를 봤습니다. 그 뒤 글쓰기로 돌아오시기는 했지만, 사실상 생산성을 거의 못 낸 것으로 압니다만.

이문열 심사 기간이 3개월 정도여서 직접적 피해는 크지 않았습니다만, 그 일을 하게 되면서 더 과장된 동료의식과 적 개념의 피해가 컸습니다. 의식이 더욱 정치화·파당화돼버린 것이죠. 게다가 상대편의 응전도 격렬해지고. 그 때문에 생긴 혼란인지는 모르지만 본격적인 작품인 <호모 엑세쿠탄스>는 잠시 미뤄두고 역사물인 <초한지>에만 매달리게 되었죠. 하지만 그 때문에 꼭 생산성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양으로는 13권이나 되니 5년치로는 그리 한심한 것은 아니죠. 오히려 그 손익 대차대조는 앞으로의 문학적 생산에 따라 결정 나겠지요.

허의도 논공행상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비례대표 자리를 제안했다면 어떻게….

“총선에서 국민 견제심리 발동할 수 있다”

이문열 (기분 좋게 웃으며)허~. 옛날에도 안 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무엇 때문에 그걸 하겠습니까?

허의도 그때는 의도적으로 안 하신 것이고,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문열 전혀요. 장례식이라든가 안 보이는 음성적 박해에 화가 나서 엉뚱한 결정을 조금 내리기는 했습니다. 정치적 간섭이랄까? 하지만 지금은 정말 전혀 뜻이 없습니다.

허의도 그 시기를 지나 한나라당은 지금 집권 여당으로 18대 총선 대열에 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조언하고 싶거나 아니면 판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신 것은 없는지요?

이문열 조언할 말도 별로 없지만, 조언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것이, 이미 내 조언이 먹힐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 총선의 경우 17대와는 다른 원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조언해 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허의도 그럼 이번 총선의 공천 원칙이나 실제 공천이 합리적이었다고 인정하십니까?

이문열 글쎄요. 이번 공천에는 어딘가 비엔나회의 원칙처럼 정치적 강약에 의한 분배가 이뤄지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그게 바로 불합리라고 할 수 있을지는…. 그러나 그 선택이 대중의 지지와 다를 때는 문제가 생기겠죠. 유권자의 지지가 적은데도 당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공천을 따낸 경우 말입니다.

허의도 경우에 따라서는 ‘안정 정치’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의석을 한나라당이 못 얻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과격하게는 ‘여소야대’ 말입니다.

이문열 안정적이기 위한 의석 수로 보통 과반수를 말하는데, 굉장히 조심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봅니다. 공천뿐만 아니라 인수위원회의 의욕 과다와 성급함이 쏟아낸 부작용도 많아서…. 자칫 국민 사이에 (한나라당을) 견제해야겠다는 이른바 견제심리도 발동할 수 있습니다.

허의도 인수위의 부작용이라 함은 어떤 것을 말씀하시나요?

이문열 시행착오로 볼 수도 있지만 지나친 데가 많았어요. 나중에 정통부 국장이 발표해야 할 휴대전화 통화료부터 시작해서 성급하게 발표만 해놓고 나중에 흐지부지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영어교육에 관한 정책 천명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고 했다가, 한 발 물러서서 영어 수업만 영어로 한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1주일에 한 번만 영어로 수업하는데 그것도 강제는 아니라고 했죠. 게다가 또 중요한 문법사항을 설명할 때는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덧붙였죠. 결과적으로 보면 1주일에 한 번만 영어로 수업할 학교는 그렇게 해라. 그런데, 그 때도 필요한 것은 한국말로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멀리 돌아온 것이죠. 정말 보기에 실망스럽고 걱정스러웠습니다.

허의도 최근 2년간 영어권에 있으시면서,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도 상당했을 것 같은데요?

이문열 2년여를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난해까지는 나 스스로에 골몰해 미국과의 접점을 거의 찾지 않고 지냈어요. 재작년에는 가서 차도 안 사고 책 쓴다고 들어앉아 있다 간혹 학교나 왔다갔다했죠. 지난해부터 조금 여유가 생겨서 6~7개월은 미국사회와 접촉할 기회가 있었고 또 이번에 가면 본격적으로 시도할 것입니다.

허의도<호모 엑스쿠탄스>를 버클리에서 쓰셨죠?

이문열 가서 2,000장 넘게 썼죠. 그래서 재작년에는 더 정신이 없었고요. 차는 지난해 보스턴으로 옮긴 뒤에 샀어요. 차를 사고 운전하고 다니기 시작하자 미국사회를 조금 경험하게 됩디다. 아직까지는 몇 가지 주목해서 잘 관찰해야겠다 싶은 것을 발견만 했지, 제대로 관찰을 시작하지는 못했어요. (미국사회를) 안다고 하기에는 까마득하고….

허의도 관찰 주제를 찾으셨다니 반갑네요. 혹시 앞으로 소설적 소재로 삼을 생각이십니까?

이문열 소설의 소재가 될 수도 있고, 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나뿐만 아니라 내가 포함된 한국인을 파악하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인과 미국, 우리의 세계화에 대한 위치 정립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허의도 혹시 어떤 내용인지 공개가 가능합니까?

이문열 미국의 주도세력 또는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미국을 이끌어 나가는 허리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한 사회의 발전 또는 발전의 추동력이 되는 계급을 중산층이라고 하잖아요? 나는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이 중추가 되는 계층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미국의 중산층이 누구인가를 유심히 살펴보는 중인데, 아직까지는 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조금 난감해요.

“미국의 중산층 세밀하게 관찰해보고 싶어”

매일 거리에서 마주치는 도시민을 미국의 허리이자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어쩐지 이 사회가 무망하고 무모하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미국은 동부나 서부나 대도시는 유색인종이 도시민의 절반을 넘어요. 본질적으로는 아직 뜨내기 감정을 다 청산하지 못하고 시선은 현재에만 고정돼 있는 그들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값싼 상품을 헐값으로 소비하는 것을 풍요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저 사람들이 미국의 중산층이고 허리이고, 미국 정신의 토양이라면 말입니다.

허의도 무망함이라고 보기보다 역설적으로 다민족 국가로서의 강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문열 우리가 단일민족국가이니 거기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국가의 힘 또는 발전의 원동력을 말할 때는 상호 소통과 일체감 등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관찰을 시작한 미국 중산층에서는 그것이 별로 이뤄지는 것 같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무엇이 저들을 얽어 세계 최강의 미국을 만드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죠. 내가 느끼기에는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는 악착같이 무엇인가를 모으거나 이루는, 우리한테는 익숙한 성취감이나 축적의 개념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허의도 이미 성장한 나라이기 때문에 잘 안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성장 중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개인의 직접적 체험으로 느껴지는 것이고요.

이문열 그럴지도 모르죠. 어쨌든 혼란스러웠던 것은, 어떻게 이 나라는 축적이나 성장보다 소비와 향유가 더 미덕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그런 말은 들었지만, 저로서는 아직 그런 정신적 메커니즘이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허의도 관찰 과제 말고, 당장의 글쓰기 과제도 찾으셨는지요?

이문열 올해는 새로운 글쓰기는 안 할 것입니다. <초한지> 10권을 쏟아내 놓고 또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허의도 미국에서 매듭지으셨던 <호모 엑스쿠탄스>는 요즘의 시대상황, 특히 정권교체와 견주어 보면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문열 그 책도 세상의 이상한 편견과 선입견의 폭탄을 맞아 사람들이 안 읽어보고도 다 읽은 것처럼 돼버렸죠. 줄거리까지 다 아는 척 이야기할 수 있으면서도 안 읽어본 사람이 꽤 많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그 책이 충분히 제 나잇값을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읽어봐도 참 유효하고, 매우 재미있다고 자신합니다. 또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변화에 대한 해답도 상당부분 나와 있고요.

허의도 그리고 <초한지>로 넘어오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초한지>가 줄 수 있는 메시지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새 대통령에게 <초한지>를 빗대 한 말씀 하신다면….

이문열<초한지>를 시작한 것은 2003년 무렵입니다. 현재 이 상황하고 맞춰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죠. 오히려 초기에 연재를 시작했을 때, 진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나타나는 연횡책과 합종책을 우리의 통일정책에 빗대 이야기해보고 싶어한 적은 있었습니다.

허의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하시면요?

이문열 우리가 흔히 합종책과 연횡책을 당시 분열된 중국의 일곱 나라,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 사이에 있었던 외교정책으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일반적으로 나뉘었던 두 가지 방법이 아니라 연횡책은 진나라의 외교정책이었고, 합종책은 나머지 6개 나라의 외교정책이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진나라가 서쪽에 있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부챗살처럼 6개 나라가 세로로 퍼져 있습니다. 이 6개 나라가 힘을 합친다는 것이 합종이고, 진나라가 어떤 한 나라와 횡으로 손을 잡는 것이 연횡책이죠. 억지든 뭐든 북한은 하나로 강하게 통합돼 있는 사회인 반면 남한은 다양하게 분열된 사회입니다. 지역적으로도 그렇지만, 경제·교육·사상 등 여러 면에서 적어도 대여섯 개는 되는 핵이 연합한 사회로, 결국 합종한 6국 같은 형국입니다. 따라서 남북통일을 이야기하려면 남한사회가 먼저 내부 통합을 이뤄야 합니다. 곧 6국이 합종을 이뤄 먼저 진나라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진 상태에서 협상을 시작해야 하다는 것이죠.

“<초한지> 통해 대북정책의 앞날 내보였다”

남한사회의 일부 세력만이라도 먼저 북한과 손잡고 통일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자칫 6국이 개별적으로 진나라의 연횡책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모두 50%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는데 이들이 나머지 50%의 반감을 방치하고 북한과 ‘우리 민족끼리’ 어찌해 보겠다고 서둘러댄 것입니다. 나머지 50%를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분열시키고 약을 올려 가며…. 다시 말해 남북통일을 말하면서 남남분열을 첨예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작가 이문열은 <초한지> 이야기로 돌아갔다.

“진나라가 연횡책을 동쪽 6국에 강요한 수단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나라는 ‘객경(客卿))’이라고 해서 외국 국적의 인재에게 벼슬자리를 열어줬습니다. 또 그들이 돌아가겠다고 하면 돌려보내 주는데, 그때는 이른바 이들을 고정간첩으로 활용했죠. 이들에게 아낌없이 황금을 줘서 그 나라 조정을 오염시키고 연횡책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칼이었죠. 황금으로 매수되지 않으면 자객을 보내 연횡책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초한지>를 보면 연횡책을 주도하는 사람이 재상이 된 나라가 가장 먼저 망합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게 되죠. 마지막까지 버티던 제나라 왕을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도록 한 신하들이 바로 그런 객경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대가 좋아서 평화이고 자주이지,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고정간첩이 될 진나라의 객경 같은 사람이 꽤나 많을 것입니다. 남한사회를 분열시켜 가며 저지르고 본 햇볕정책이 북한에 의해 악용된다면 우리나라도 6국처럼 한 분야씩차례로 무너져갈 수 있습니다. 연횡책과 합종책에 관해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초한지> 전체로 봤을 때 초기에 잠깐 나오는 이야기여서 화두만 던지는 선에서 지나갔죠.

허의도 그런데, 합종을 이루고 난 뒤 연횡하자는 것이 사실 지난합니다.

이문열 그러나 합종에 유의는 해야죠. 지난 정권을 보면 합종은커녕 그들의 친북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남한사회의 분열을 심화했지요. 이를테면 남북 문화교류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를 예로 들면 지난 10년 동안 문화교류를 한다고 그렇게 많은 문인이 왔다갔다했지만 나는 한 번도 끼어 보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사람들만 ‘우우~’ 데리고 가서 돌아오면 김정일 용비어천가나 부르게 하는 것이 무슨 남북교류입니까? 친북 단합대회이지. 적어도 지난 10년간 나는 한 번도 그들이 자기들의 대북정책을 설득시키려는 노력이나 성의를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이문열은 정치 이야기에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반면 화제가 지난 10년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한참을 생각하며 답변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말로는 정리됐다고 하지만, 아직 지난 10년간 쌓인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지는 않은 듯했다.

허의도 앞서 여러 가지가 정리됐다고 하셨는데, 지난 10년 시대와의 불화를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초한지> 서문에 지난 10년의 ‘앙앙불락(怏怏不樂: 매우 마음에 차지 아니하거나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아니함)’을 말씀하셨던데….

이문열 잘못하면 아직도 감정을 다 삭이지 못해 ‘앙앙불락’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또 지난 10년을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고약한 세월이었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다른 학술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문화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을 징벌하는 방법은 일반 사람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조금 새기는 합니다만, 1980년대 한 방송 대담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방송 전 휴게실에서 내 카운터파트 역할로 나온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와 다른 입장일 것이라는 추측은 했지만 30여 분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의견의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그런데 토론대에 서자 생각 밖으로 엄청나게 강경하고, 심지어 조금 전 휴게실에서 한 말을 바로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지난 10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징벌 받아”

그래서 내가 방송이 끝난 후 그 교수에게 어찌된 것이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 교수님이 “지금 우리가 제일 겁나는 것은 안기부에 끌려가 몇 대 맞고 감옥 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어용으로 몰려 학교에 대자보가 붙는 것입니다. 대자보에 한 번 오르면 우리는 교수생활 끝납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허의도 우리의 1980년대 정서가 그랬죠.

이문열 지난 10년의 세월이 나한테 바로 그랬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정권은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정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권에 의해 경찰이 나를 잡아갔다거나 혹은 안기부에 끌려가거나 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학자나 문인을 가장 효율적으로 징벌하는 수단인 인민재판에 걸렸던 것이죠. 더구나 때마침 운수 나쁘게도 인터넷이라는 이상한 초기 대자보에 걸려서…. 나는 지금도 그 친구들을 현대판 홍위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이 집에 와서 책 장례식을 했던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 시민단체가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와 나도 대응해야 했는데, 그것도 같은 것으로 두 번이나 법원에까지 불려가야 했습니다. 이쪽에서 한 번 한 것으로 모자라 똑같은 건으로 다른 지부에서 또 소송을 건 것입니다. 지난번에 서울본부에서 소송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대전지부에서 소송을 거는 식이죠. 그러면 이것이 법원에서 같은 소송이라고 해서 기각 결정을 내려줄 때까지 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조사받으러 오라면 가야 하고, 서면자료를 내라면 내야 하고…. 별 것도 아닌 소송에, 이겨도 내게는 아무 이득이 없고 지면 사람이 망가지는 소송 때문에 내가 3년을 고생했습니다. 하여튼 미국으로 나갔던 2005년 무렵에는 내 스스로 거울 보기가 걱정될 정도였어요. 거울을 보면 내가 정말 심술로 비꾸러진 영감이 되었구나, 이건 안되겠다, 일단 이쪽과 거리를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나갔던 것입니다.

허의도 미국에 계시면서도 지난해 12월 대선 결과를 일찌감치 감을 잡았습니까?

이문열 나는 몰랐어요. 오히려 미국에 있을 때는 끝까지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죠. 인터넷 신문과 이메일을 통해 보는 것으로는 실제로 돌아가는 대세론이 전혀 감지가 안 됐죠. 오히려 매일매일이 위기처럼 보였어요. 내가 12월 초순에 들어왔는데, 들어오니 사람들이 참 태연하기에 어째서 그러느냐고 묻고 다녔죠. 그런데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무조건 이 후보가 이길 것이라는 겁니다. 아마 함께 묻어 살면서 그런 공기를 피부로 느낀 것 같았어요.

허의도 이제 한국의 보수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잃어버린 10년’을 보내고 새 출발을 하는 셈입니다. 예전과 달라진 보수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문열 2004년 하반기에 ‘적화는 끝났고 통일만 남았다’는 농담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2004년과 같은 위기를 다시 안 만나려면 한국의 보수 혹은 한국의 소위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전의 우파 혹은 예전의 보수로 남아서는 그런 위기가 또 옵니다. 4년 뒤 혹은 5년 뒤 더 험한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보수가 건강해져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 출발하는 사람들보고 나쁘게 말하기는 뭐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걱정스럽고 비관적입니다.

허의도이명박 대통령과는 개인적 인연이 있으십니까?

이문열 1990년대 초반부터 몇 번 만나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개별적으로 만나뵌 적도 있고, 또 그 뒤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한두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죠. 지난해 잠깐 들어왔다 미국으로 나갈 때도 전화를 받았는데, 왜 또 가느냐고 하시기에 ‘당연히 갈 것을 간다. 나는 전혀 정치할 사람도 아니고, 보니까 잘하고 계신 것 같다. 분투하시라’ 하고 나갔죠.

허의도 당선된 이후에는 접촉하거나 연락 안 해보셨습니까?

이문열 못했어요. 정신 없을 텐데요, 뭐.

허의도 비서실장으로 들어간 류우익 실장과도 교류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한반도대운하는 대국민 홍보의 실패작

이문열 오래 모임을 같이했습니다. 진덕규 교수님이 좌장 격이고, 내 나이 또래로 류우익·김석준 교수가 있었죠. 류우익 실장은 굉장히 신실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2004년엔가 매달 한 100여 명씩 데리고 국토순례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여행을 다녔어요. 한 번은 내가 귀찮아서 어떻게 한 달에 한 번씩이나 그 많은 사람을 데리고 다니느냐고 했더니, 잘못하면 광화문에 인공기가 휘날리게 생겼는데, 그때 꽥 소리라도 지르고 죽으려면 작더라도 조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린다고 하더군요. 내가 소설책을 포함해 어떤 책이고 간에 발문을 써준 적이 거의 없는데, 재작년에 류 실장이 그 여행기를 책으로 내는 데는 발문을 써준 적이 있어요. 전에 들은 말이 하도 인상 깊어서요. 그때 나도 한참 울적하고 속상했을 때 아닙니까? 그런데 류 교수의 말을 들으니, 그래도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허의도 새 정부가 참 현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한반도대운하 건설입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대운하를 머릿속에 그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문열 이해하려고 굉장히 애 쓰는 중입니다. TV에서 토론을 한다거나 신문에서 종합 점검 기사를 낸다고 하면 열심히 보는데 아직까지 요령부득입니다. 우리가 양자택일의 판단을 내릴 때는 그래도 양쪽 주장의 근거가 어느 정도 근접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 건은 찬반 양측의 자료가 너무 달라 판단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건설비용만 해도 적게 말하는 측은 14조~15조 원이라고 하고 많이 말하는 측은 80조 원까지 말하거든요. 조금 근접한 수치가 16조 원과 62조 원입니다. 이래서는 비교가 안 돼요. 이것을 믿겠다 아니면 저것을 믿겠다 선택만 할 수 있을 뿐이죠. 또 하나 고약한 것은, 그러면 정부는 적극적으로 옹호 논리를 개발해 홍보하든지 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늘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허의도 민자로 건설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약간 뒤로 물러서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부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대국민 홍보 부족으로 아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내부의 대운하 팀은 완벽한 청사진을 다 가지고 있고, 성공을 확신한다고 하거든요.

이문열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이 대국민 설득인데, 내가 보기에 지금까지는 완전히 실패인 것 같습니다. 나 같이 기본적으로 우호적 감정을 가진 사람도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으니.

허의도 정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죠. 민노당의 진로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자주파와 평등파가 갈라서게 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평등파 수준에서의 민노당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십니까?

이문열 이번 한나라당의 승리에 대해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유 중 하나인데 나는 민노당의 분당 사태를 보고 섬뜩하게 느낍니다. 민노당 분당 사태의 골자가 민노당 내 평등파 지도부가 종북주의 청산 카드를 들고 나오자 종북주의자들로 지목된 자주파 세력이 현 지도부를 쫓아낸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커 지도부를 쫓아내더라도 자기들이 혐의를 받은 종북주의에 대한 입장 표명은 있어야죠. 우리는 종북주의가 아닌데 우리를 종북주의라고 하는 너희가 틀렸다거나 아니면 종북은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라든가 하는 태도를 밝힌 뒤 불신임을 해도 했어야 합니다. 이미 종북주의라고 의심을 받는데 그에 대한 변호는 하지 않고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을 쫓아낸다는 것은 종북주의를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공공연하게 종북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이 우리나라에서 정당활동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마땅한 일인지 생각해볼 문제죠. 좋게 생각하면 민주주의 만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리 사회를 보호하는 둑이 하나 무너진 것입니다. 만약 지금의 민노당 자주파가 말 그대로 ‘우리는 자주파일뿐이고, 북한과 같이 보조를 취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주적 판단에 의한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일방적으로 북한을 추종한 적이 없는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일 뿐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정당은 당연히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해야죠. 그런데 그걸 하지 않고 오히려 종북주의를 천명하듯 반대 세력을 제거해 버리는 세력도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는 판이니, 종북 투항주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허의도 민노당 쪽에서는 자기네가 진짜 진보 정당이고 노무현의 참여정부, 즉 열린우리당은 ‘짝퉁’이었다고 비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이번 대통령선거가 노무현의 진보를 평가한 것과 다름 없는데, 그 평가를 받으면서 민노당이 같이 단죄를 받은 것이라고 보십니까?

“지적활동의 근거 만드는 데 몰두하겠다”

이문열 나는 그렇게 봅니다. 왜냐하면 민노당 사람들 대부분이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받을 때 비례대표로 된 것이거든요. 그때 (민노당 지지도가) 5%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3%가 안 됩니다. 충분히 심판받은 것으로 봐야겠지요.

허의도 선생님 개인적 이야기를 몇 개 물을까 하는데요. 이번에 미국으로 나가시면 바로 매달릴 작업이 있습니까?

이문열 내가 지난해부터 하는 일 중 하나가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에 대한 근거를 보완하는 작업입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아 그 사람 그거 할 만해” 하고 남들이 말하면 근거가 있는 것이고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이것을 했지”라고 하면 근거를 의심받는 것이죠. 내가 근거 없는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 <삼국지><수호지><초한지> 등 중국 고전을 번역한 일입니다. 내가 대학에서 중국문학이나 동양학을 전공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서당에서 고색창연하게 한문을 배운 적도 없거든요.

허의도 근거 없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는데, 근거가 없다고 하시니 또 근거가 없는 것도 같네요.

이문열 한문도 오다가다 한 것이지 어디에 내세울 만한 근거가 별로 없어요. 특히 <수호지>는 내 어설픈 송대(宋代) 백화(白話)) 실력으로 갖은 고생을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한심스러운 것이 누가 수호지 원문을 가지고 와서 다시 번역해 보라고 하면 할 자신이 없어요. 중국어사전을 주면서 하라고 해도…. 그런데 지난해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보니 내가 6개월 아니 1년만 더 공부해도 어찌 해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백화는 하나의 예이고, 내 지식의 불철저함 혹은 체계 없음이 사방팔방에 널려 있어요. 지난 2년을 써버렸는데, 앞으로 2~3년 더 쓰는 한이 있어도 내 지적활동에 체계를 부여하고 근거를 확보했으면 합니다.

허의도 그간 서사적 테마에 많이 매달린 작가로서 멜로적인 데로 빠지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은 없습니까?

이문열 대부분의 소설가는 멜로였다가도 나이가 들면서 서사로 가죠. 멜로 소설은 상당히 감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있어야 쓸 수 있는데, 나이를 먹으면 둔해지거든요.

허의도 그럼에도 상당수 작가들이 연륜을 쌓아가면서 진짜 멜로 한번 써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노련한 역량으로 연애소설의 결정판을 한번 내고 싶은 욕심이나 자신이 생기는 거죠.

이문열 나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멜로는 나이가 들어서는 쓰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이념의 깊이라든가 관조의 힘이 주제에 끼어들게 되거든요. 또 끼기를 희망하고요. 그런데 멜로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와 관련된 것으로 여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들한테는 삶의 절반을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살면서 여러 형태의 관계를 맺게 되죠. 그런데 그 관계라는 것이 20대 때 맺은 것과 30대 때 맺은 것, 그리고 40대, 50대 맺은 것이 다 다르거든요. 이 나이가 되면 그것이 총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한번 관조해보고 싶어지죠. 남자인 나한테 여자는 무엇이었고, 구체적으로 만나왔던 그 여자들은 누구였던가? 이것을 한번 과장하거나 호들갑떨지 않고 애잔하게 그려보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여인들을 보내며>라고 제목도 생각해 놨어요.

허의도 ‘여인을 보내며’라…. 통속적이면서도 철학이 묻어나는 타이틀입니다. 격조 높은 멜로가 될 수 있겠죠. 어쨌거나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다 실화입니까?

이문열 그럼 소설이 안 되죠.(웃음) 오히려 전혀 실화가 아니라는 걸 전제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허의도 담배로부터는 자유로워졌습니까?

이문열 지금은 거의요.

문학시장의 축소는 일색화한 문단의 자승자박

허의도 몇 년 되셨죠?

이문열 홍위병들과 싸우면서 끊은 것이니 벌써 7년 됐네요. 내가 원래 몸은 좀 뚱뚱해도 혈압도 없고, 당뇨도 없는 것이 자랑이었는데, 그때 혈압과 당뇨가 생겼거든요. 특히 혈압이 많이 올라 의사가 담배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죠. 가만히 생각하니 이 고비를 이기고 살아남아 이 애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 끝을 꼭 봐야겠다 싶더군요.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것을 봐야겠다 싶자 담배 생각이 싹 없어지더군요. 그래서 아주 쉽게 끊었어요.

허의도 지금도 가끔 생각이 안 납니까?

이문열 관념적으로 그리울 때가 있는데, 그것뿐입니다. 몸은 다 잊어 가는 것 같아요.

허의도 술은 어떠십니까? 요즘도 많이 드십니까?

이문열 술은 지금도 마셔요. 그런데 술도 결국 작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걱정입니다. 요새 많이 나빠요. 술을 마지막으로 마신 지 한 1주일 됐는데, 아직도 술 생각이 별로 안 나요. 나는 몸이 안 좋으면 술 생각이 안 나거든요. 오히려 굉장히 부담이 돼요. 나는 예전부터 술을 마시면 정신을 잘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술 마신 다음날 하루 아주 고생하고 나면 사흘째 되는 날은 기분이 새로워져요. 모든 것이 다 씻겨 내려간 듯한 기분.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못해요. 사흘이 지나도 묵직한 피로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허의도 그 동안 문단의 동료나 선후배 관계도 많이 소홀해졌을 것 같은데, 이제 정권도 바뀌고 친화해질 수 있는 관계 속에서 그 교류도 해볼 여력이 있습니까?

이문열 이제 와서 새삼 그럴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옛날의 앙금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고, 어울리게 되겠지요. 그렇다고 내가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때(책 장례식) 무척 적막했던 기분은 남아 있죠. 그 일이 나한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들도 그들을 싫어하는 독자를 가질 수 있고, 또 그 독자들이 그들 소설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아무런 저항 없이 마치 있어온 사회 관행이라도 되듯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문인단체에 대해서는 불신을 오래 못 씻을 것입니다. 문인단체는 그때 이후로 어떤 단체와도 내가 거래한 적이 없고, 믿거나 의지해본 적도 없습니다.

허의도 후배 소설가 중에서는 주목하거나 주목하면서 교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문열 예전에 우리 집에 드나들던 후배들과 교류하는 정도죠. 나는 지난 10년 동안 문단이 이렇게 일색화한 것도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만 해도 문단이 어느 정도 나뉘어 서로 싸우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특히 문단의 주도세력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문단이 완전히 일색화해 나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졌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허의도 지금 작가에 도전하거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시장이 너무 작아져 힘겨워 보입니다. 예전에 스타 군단에 있던 선배 작가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경제적 여유를 염두에 두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이문열 그것도 내가 보기에는 작가들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가장 분노한 것은 사실은 문화의 왜곡된 집중과 낭비적 중복투자입니다. 이렇게 문화가 왜곡되고 문화의 중심이 너절한 대중 장르로 옮겨가는데, 작가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비판하고 저항한 사람이 있습니까? 전부 ‘우~’ 하고 따라가 여기까지 와 놓고 이제 와서 시장이 줄었다고 한탄하면 그거야말로 문제가 있지요.

“부악문원 감당하기 너무 힘들다”

허의도 혹시, 미국 체류가 더 길어질 여지가 있습니까?

이문열 있습니다. 사실 3년째라고 하지만, 거의 앞의 2년은 제대로 내 미래를 위해 쓰지 못했습니다.

허의도 부악문원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문열 부악문원이 1998년 문을 열어 올해가 딱 10년째입니다. 공식적으로는 4기까지 배출했고요. 그런데 지금 머무르는 학생이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이런 시스템이 필요한가, 또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가입니다. 경제적 부담이 문제가 아니라, 작가로서 내가 부담해야 할 정신적 소모 때문입니다. 감당하기에 너무 의문이 많이 남습니다.

허의도 어떤 의문이 남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문열 토지문화관이나 만해문학관은 이용객이 많아 신청해도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개방돼 있어도 사람들이 잘 안 오거든요. 예전에는 세상이 전부 나를 욕하니까, 그래서 학생들도 안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작가들한테 물어보니까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토지문화관이나 만해문학관은 공공기관의 보조금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작가들이 거기서는 누구한테 신세를 진다는 느낌이 아니라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죠. 여기에 오면 공연히 이문열 밥 얻어먹는다는 사적인 부담감이 드는 데 비해서 말이죠. 시설도 그쪽은 호텔 수준으로 깨끗하고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낡기 시작했고요. 서비스 경쟁에서도 뒤질 뿐 아니라 마음의 부담까지 주는데 사람들이 올 턱이 없죠. 하지만 또 내 입장에서는 내 소모를 해가며 서비스 경쟁에 나설 이유도 없는 것이고요. 고민입니다.

허의도 부악문원에 얽힌 매듭이 잘 풀려가기를 빌 뿐입니다. 오랜 시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시간이 넘게 거침없이 속내를 털어놓은 이문열.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부악문원은 해거름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밝음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저녁 약속이 있으니 올라가는 차편에 태워달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월간중앙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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