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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세 번 풀어준 부실수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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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4일 e-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자신을 ‘안양 어린이 유괴·살해사건을 담당했던 직원’이라고 밝혔다. e-메일에는 수사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는 경찰의 부실 수사를 고백했다. 수사 초기부터 용의선상에 올랐던 피의자 정모(39)씨를 구체적인 조사도 없이 세 차례나 풀어 줬다고 알렸다.

지난해 12월 25일 이혜진(11)·우예슬(9)양이 실종되자 경찰은 안양 8동 일대에 대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정씨는 5일이나 집을 비워 둔 데다 동네 부녀자를 성추행하려 했다는 제보가 있어 수사 초기부터 용의선상에 올랐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대리운전을 했다’는 정씨의 말만 믿고 대리운전 회사에 근무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씨가 두 번째로 용의선상에 올랐다가 배제된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군포서 관계자로부터 ‘전화방 도우미 실종사건 용의자가 안양 8동에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아 정씨를 조사했다는 것이다. 수사팀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정씨의 집에 대해 루미놀 검사(혈흔반응시험)를 했으나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씨는 그렇게 경찰 수사망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군포에서 여동생이 정씨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니 이번 사건도 정씨가 의심스럽다’는 제보도 있었다.

경찰은 한 달 전에 뽑아 뒀던 렌터카 대여자 명단을 그제야 다시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실종 당일 렌터카 대여자 명단 중에 정씨의 이름이 발견되자 수사팀은 그제야 정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국과수로부터 렌터카에서 발견된 혈흔이 이혜진양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고 나서 경찰은 정씨를 긴급체포했다.

그는 “한 달 동안 렌터카 대여 목록만 뽑아 놓고 확인도 하지 않았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12월 25일 렌터카 명단에서 우연히 정씨 이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정씨의 당일 행적 확인도 안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특히 “형사들이 추가 증거 확보에 나섰지만 경기청 지휘부에서 ‘무조건 잡아 오라. 다 자백한다’며 다그쳐 긴급체포를 했다. 증거도 없이 체포해 자백이 늦어졌고 하마터면 구속영장도 받아 내지 못할 뻔했다”고 내막을 전했다.

그러면서 “담당검사가 이런 드라마 같은 수사가 어디 있느냐고 비꼬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고 밝혔다. 한창 수사가 진행될 당시 ‘안양 인근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여자 아이를 실종 아이와 오인해 한 달 가량을 엉뚱한 곳에 수사력을 집중했다’는 내막도 전했다.

수사 지휘라인의 혼선도 지적했다. 수사본부에 경기지방경찰청 폭력계장·강력계장 등이 지도관 명목으로 투입됐다고 한다. 그는 “경찰대 출신 선배들의 의견에 토씨 하나 달기 어려워 안양서 형사과장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일선 형사들의 의견도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씨는 군포 여성 실종사건과 성폭행사건 등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군포경찰서에서 조사받았지만 두 어린이 사건을 수사하는 안양경찰서에서는 한 달이 넘도록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경기경찰청 “사실무근”=이에 대해 경기청은 보도진상문을 만들어 반박했다. 수사본부 관계자는 “성범죄자 위주로 순차적으로 조사했고 초기에 정씨의 집에서는 루미놀 반응이 나오지 않아 유력한 용의자로 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기청은 긴급체포를 너무 서둘렀다는 지적에 대해 “피의자 정씨가 대여한 렌터카에서 피해자들의 유전자가 발견됐고 최초 수사에서 렌터카를 대여한 사실을 숨겨 충분히 증거가 확보된 상태였다”고 해명했다. CCTV에 찍힌 여자 아이를 오인해 시간을 허비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한 가족은 비슷하다고 해 실종 아이들일 가능성에 대해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박유미·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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