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당의 공천자가 속속 확정되면서 사진작가 송정근(38)씨의 일정표가 빽빽해진다. 송씨는 벽보·현수막·명함 등 선거 홍보물에 실릴 후보들의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작가다. 1996년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사진을 찍은 이래 13년 동안 이 일을 해온 그의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노무현·고건·문국현·임채정 같은 거물 정치인들이 거쳐갔다. “이젠 사진 한번 찍으면 이 사람의 당락이 대충 짐작이 간다”고 말하는 그에게 렌즈 속 얘기를 들어봤다.
최근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을 촬영했다. 작업은 예상외로 까다로웠다. 성격 탓인지 김 의원이 좀체 웃지 않았다는 것. 굳은 얼굴을 홍보물에 실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김 의원의 결혼을 비롯한 일상생활을 화제로 올려 얼굴을 밝게 만들었다. 결국 미소 짓는 표정이 렌즈에 잡혔다.
수많은 정치인을 만났지만 가장 사진에 공을 들인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은 정동영 전 장관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시사지 사진기자를 잠깐 했던 송씨는 “96년 1월 정 전 장관을 찍은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쌀쌀한 날씨 속에 이뤄진 촬영은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오랜 기자생활을 접고 정치권 진출을 결심한 정 전 장관은 수첩을 들고 뛰는 역동적인 취재 장면을 담고 싶어 했다. 만족스러운 한 컷을 얻기 위해 정 전 장관은 전쟁기념관 계단을 100번 이상 오르락내리락했다. 와이셔츠 바람이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래도 정 전 장관은 아무런 불평 없이 열심히 지시에 따랐다.
후보자가 활짝 웃는 얼굴을 앞세운 것도 당시로선 드문 시도였다. 정 전 장관의 환한 표정이 호평을 받으면서 이후 엄숙한 얼굴 일변도의 정치인 포스터가 많이 밝아졌다.
송씨는 “정 전 장관은 사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의지가 뚜렷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 또 한 사람은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2004년 유한킴벌리 사장이었던 문 대표는 촬영 일정을 잡으면서 분 단위 스케줄을 제시해 인상이 깊었다고 한다. “1시57분 촬영에 들어가 2시14분까지 찍은 다음, 17분부터 미팅에 들어갔다가 회의 후 다시 촬영하자”는 식이었다는 게 송씨의 기억이다.
국회의원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촬영했던 일 또한 생생하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송씨는 “유명인을 찍어 오라”는 숙제를 하기 위해 ‘청문회 스타’였던 노 전 대통령을 무작정 찾아갔다. 송씨는 “노 전 대통령이 일절 미디어에 나서지 않을 때여서 허락해줄까 싶었는데 학생이라고 하니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처음에 “정치를 반대한 아내(권양숙 여사)에게 외부인을 집 안에 들이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못 찍는다”는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결혼할 때의 계획은 이맘때쯤 부자가 돼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었는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씨는 노 전 대통령을 밤늦게까지 자택 앞에서 기다려 설득한 끝에 촬영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대선 이틀 전 막판 유세를 위해 KTX를 탄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을 땐 촬영 직전까지 참모들과 열띤 전략회의를 하던 이 대통령 모습이 인상 깊었다. 토론 중이던 이 대통령은 화장을 고친 후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사진 찍고 나면 당락 알아
정치인의 개인생활 면모를 엿보는 것도 그의 특권 중 하나다. 사진촬영을 위해 후보의 집을 찾아가 직접 옷까지 골라주는 일이 왕왕 생긴다. 특히 임채정·유인태 의원의 경우 옷장이 너무 초라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가 꼽는 이미지 정치의 최고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선글라스 낀 사진과 막걸리 마시는 모습, 벼 심는 모습, 이 세 가지 이미지로 18년간 국가를 통치했다”는 것이다. 송씨는 “권위주의 시대의 전형인 이 같은 선거사진들을 대중친화적이고 캐주얼하게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밝혔다.
술 오른 얼굴 때문에 곤욕도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한 광역단체장 후보는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고 촬영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 연출됐다. ‘IMF 사태’를 극복한 진지한 이미지를 담아야 하는데 얼굴에 술이 잔뜩 올라 2시간 넘게 촬영하고서야 겨우 한 컷을 얻었다.
같은 선거에 나섰던 고건 전 서울시장은 일정이 빡빡하다며 5분 만에 촬영을 끝내기도 했다.
98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양쪽 눈 크기가 유달리 차이가 나는 경우였다. 최 전 시장은 “아침에 컨디션이 좋으면 크기 차이가 덜 나니까 아침에 일어나 상태가 좋으면 연락을 주겠다”고 해 서너 번 시도한 끝에 만족스러운 사진을 얻었다.
송씨가 보통 한 명의 후보를 촬영하는 횟수는 1000장 정도. 셔터도 수명이 있어 선거 때마다 새것으로 교체한다. 사진촬영은 보통 꼬박 하루가 걸리지만 요즘 같은 성수기엔 의뢰가 밀려 3~4명을 소화하는 날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송씨처럼 여러 정치인이 몰리는 작가는 5명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향후 정치사진 트렌드에 대해 “이제 덜 웃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요즘은 다들 웃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후보자들이 앞으로는 좀 더 책임감과 무게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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