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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도 '머피의 법칙'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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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머피의 법칙'이란 게 있다. '안 좋은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는 경험칙을 일반화한 것이다.

소풍이나 운동회 날엔 반드시 비가 오고, 시험 보는 날엔 항상 날씨가 추워진다. 수퍼마켓의 계산대에선 꼭 내가 선 줄이 가장 늦고, 밀리는 도로에서 차선을 바꾸면 항상 먼저 있던 차선이 더 잘 빠진다. 인생은 왜 이리 재수 없는 일의 연속인지 모르겠다고 푸념하지만 재수 없는 사건은 어김없이 닥치고야 만다.

얼마 전 만난 한 경제계 인사는 농담처럼 "우리 경제가 꼭 머피의 법칙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가 잘 될 만하면 꼭 발목 잡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수출이 잘 되는가 싶으면 원자재를 못 구해 난리고, 난데없이 국제 기름값이 올라 기업들의 원가부담을 늘리기 시작한다. 오랜 침체 끝에 경기가 살아날 만한 때가 되자 하필이면 선거철이 다가오고,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끝날 만하면 새로운 비자금이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정치인들은 웬만하면 정국을 원만하게 이끌어 갈 수도 있으련만 꼭 정국을 파국 직전으로 몰고 간다. 정치파동이 한 고비 넘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새로운 파행이 벌어진다. 경제를 살리자는 데는 모든 사람들이 한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일이 꼬이고야 마는가.

그러는 사이 세계 각국의 경기가 회복의 기지개를 켜는데도 한국 경제는 아직 동면 중이다. 미국의 경기가 살아나고 유럽도 회복의 조짐이 완연하다. 중국과 인도는 성큼성큼 앞서나가고, 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대만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그 뒤를 바쁘게 좇고 있다. 일본도 10년 침체의 부진을 털고 살아나고 있다. 유독 한국만 아직도 경기회복의 앞날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다. 정말 한국경제는 재수가 없는 것인가.

과학자들은 머피의 법칙이 재수의 문제가 아님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소풍이나 운동회가 열리는 시기는 계절적으로 비가 올 확률이 높은 철이다. 소풍 가는 날이기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비가 많이 오는 철에 소풍날짜를 잡았기 때문에 비가 온다는 설명이다. 입시철도 날씨가 추운 시기다. 수퍼마켓 계산대에서 내가 선 줄이 빠를 확률은 나머지 다른 줄들이 빠를 확률보다 훨씬 낮다. 차선 바꾸기도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머피의 법칙은 결국 치밀한 과학적 분석을 해보지 않은 채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그저 재수 탓으로 돌리는 얼치기 법칙인 셈이다. 좋았던 경험은 쉽게 잊히고 나빴던 기억은 오래 남는 심리현상도 머피의 법칙이 그럴듯해 보이는 데 한몫을 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으로 위안이 된다면 모르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원자재가 품귀 현상을 보이고, 원유값이 오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선거 날짜는 경기상황과 관계없이 원래 그 날짜로 잡혀 있다. 정국의 파행을 재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더욱 무리한 일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당장 그런 현실이 바뀔 가능성이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한 민간경제연구소의 임원 한 분은 머피의 법칙에 대해 "언제 한국경제가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느냐"고 되묻는다. 그는 한국경제가 그동안 '재수 없는' 현실의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고 했다. 길게 보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과거에 비해 더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정치가 안정되고, 다른 여건이 받쳐 주었더라면 경기가 더 빨리 살아나지 않았겠느냐"고 묻자 "그랬으면 아마 더 재수 없는 다른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종수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