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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Report] '식스 포켓 세대' 어린이 고객이 왕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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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어린이용품 매장에서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물건을 고르고 있다. [롯데백화점 제공]

알프스 산맥에서 떠왔다는 와일드알프 베이비 워터. 아기에게 분유를 타 먹일 때 물을 끓이지 않고도 타서 먹일 수 있다고 한다. 물의 성분이 순해 유럽에서 아기용으로 허가한 제품이다. 1.5L 한 병에 8000원으로 국내 일반물보다 8배나 비싸다. 이 물은 와일드알프 코리아가 수입하는데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06년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한 곳에서 팔리던 것이 현재 전국 70곳 매장에서 팔리고 있다. 매출의 80%는 부유층이 사는 강남·목동·성북동·분당 등지에서 일어난다. 비싼 가격구조에 대해 이 회사 손중용 상무는 “유통기간이 짧아 물류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 물의 유통기간은 최근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났다.

◇‘식스포켓’을 잡아라=프리미엄급 시장을 중심으로 키즈 시장이 쑥쑥 커가고 있다. 백화점 수입 아동복 매출액이 해마다 늘고 있다. 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상품들은 친환경을 앞세워 베이비 워터, 유기농 의류 등으로 번지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그린벨트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다양해질 전망이다. 어린이 펀드·치과 수도 최근 들어 급격히 늘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키즈 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있는 건 아이로니컬하게도 저출산·고령화 때문이다. 아이들의 숫자는 줄었지만 부모들의 관심은 되레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할아버지·할머니와 외할아버지·외할머니까지 아이들을 챙긴다. 아이들이 돈을 받는 주머니가 무려 6개나 된 것이다. 이를 ‘식스포켓’이라 부른다.

고령화·저출산 기조가 일찍 시작된 일본에서 1990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다. 연금을 받는 세대의 돈이 손자들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우리도 88년 국민연금제도가 도입된 이래 20년 만기를 채워 완전 노령연금을 받는 수령자가 올해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노령연금을 받는 세대는 산업화의 주역으로 돈을 쥐고 은퇴했다. 주머니가 두둑한 노인 세대의 증가와 동시에 여러 세대의 관심을 듬뿍 받는 아이들. 식스포켓 세대가 시장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손자 위해 펀드를 적금 들듯이=서울 도곡동에 사는 강모(67)씨는 최근 은퇴했다. 강씨는 갓 태어난 외손자에게 선물로 해외펀드를 들어줬다. 증여세 신고를 마쳤기 때문에 펀드 투자액 1600만원은 온전히 아이의 돈이다. 수년 후 펀드가 수익을 내면 아이는 이 돈으로 부동산을 살 수도 있다. 연금생활을 하는 김모(70)씨도 손자 5명에게 각각 펀드를 들어주었다. 1인당 증여세 공제한도인 1500만원을 넘지 않도록 했다. 10년 뒤 손자들의 대학교육비나 결혼자금에 보태려는 생각에서다. 이처럼 금융상품으로 자식·손자에게 증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미래에셋 김기영 도곡지점장은 “어린이 펀드 판매가 꾸준한 편”이라며 “아이들이 성장 후 사용할 수 있도록 대부분 저축하듯이 적립식으로 가입한다”고 밝혔다.

온라인 쇼핑몰 더오가닉코튼에서 파는 아이 티셔츠 하나에 무려 13만원이나 한다. 천을 화학 처리 하지 않은 유기농 목화로 만들어 연약한 아이의 피부에 좋다는 이유에서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수입아동복의 객단가(1인당 평균 구매액)가 2005년 89만원, 2006년 94만원, 그리고 지난해는 102만원으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롯데백화점 이선대 홍보팀장은 “직수입하는 외국 브랜드는 매출이 늘고 있지만 국내 브랜드는 오히려 줄고 있다” 고 말했다.

◇어린이 전용 치과·미장원=아이들만의 전용공간도 늘어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이 국내 최초로 어린이 병원을 만든 이래 어린이용 치과·한의원·미장원까지 생겨나고 있다. 서울 명동에 있는 어린이미용실 보보라보. 자동차 모양의 의자가 있고 앞에 모니터에서는 만화영화가 나온다. 어린이가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미용사는 머리를 깎는다. 개점한 지 1년이 좀 넘었는데 어린이 고객이 하루 평균 10~15명씩 된다. 서울 신대방동에 사는 한승연(33)씨는 “커트 한 번에 1만5000원으로 동네보다 좀 비싸지만 백화점 들르는 길에 가끔 이용한다”고 말했다.

90년대 초반 강남지역 3곳에 불과했던 어린이 치과는 전국에서 105곳이 개업 중이다.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꿈동산치과·키즈웰치과처럼 소아치과 네트워크를 결성해 진료의 광역화가 추진되고 있을 정도다. 치료 대상도 단순히 충치 치료 등에서 벗어나 앞니를 가지런히 하는 심미치료 등 외모 가꾸기로 확산되고 있다. 서비스도 아이들의 취향에 맞게 변해 가고 있는 추세다. 병원마케팅 전문회사인 크리애드 김세란 컨설턴트는 “컴퓨터와 오락기 비치는 기본이고, 대기실의 보호자를 위해 영화를 상영하는 곳도 눈에 띈다”고 말했다. 또 아이의 건강과 안전을 대상으로 한 산업도 전망이 밝다. 가령 아토피·호흡기질환·아동비만이 늘면서 어린이 건강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도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친환경을 구현한 프리미엄 제품군이 앞으로 대거 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2006년 미국의 한 시장조사에 따르면 어린이 시장 규모는 1150억 달러다. 이 가운데 아이들 스스로 구매하는 비중이 180억 달러에 이른다. 미취학 어린이의 15.4%가 온라인을 통해 구매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벌써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아이들이 게임기나 의류 등을 구매하고 있다. 식스포켓 세대의 성장으로 가계의 소비 기준이 어른이 아닌 어린이에게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봉석 경제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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