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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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그런데 순진한 남편은 자기가 20대 때 겪었던 고통을 40이다 돼서 겪은 것이다.불쌍한 사람! 그렇다면 그년은 절대 그냥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잔인하게 고통을 줘서 죽여야 한다.남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자기 가슴에는 대들보가 ■ 힌다는 진실을 세상에 회복해야 한다.희경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하늘을바라봤다.잿빛 하늘 구름 위에서 정민수가 희경의 깨달음을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임희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여보! 조금만 기다려요.제가 비명에 간 당신의 한을 꼭 풀어드릴게요.그년에게 10배,100배의 고통을 안겨줄게요.』 희경은 흐릿해지는 눈을 훔치며 고개를 떨궜다.눈물이 마구 쏟아져나오는 것 같았다.이제 진실을 만난 것이다.희경은 눈물.콧물을닦다가 문득 거지의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래,저 남자라면 능히 그이가 겪은 이상의 고통을 그년에게 안 겨줄 수 있을 거야.여자를 강간 살인하고 살해된 시체마저 철저히 농락한 것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수법이니까.희경은 자기도 모르게 거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이봐요.내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요? 그러면 당신이 심심하지않게 도와줄게요.』 『내 권태는 옥황상제가 와도 못 고쳐.세상의 희노애락 다 누려봐도 떠나지 않는 이 마음속의 허전함을 누가 들어내 주겠어.』 거지가 잠꼬대하듯이 대답했다.희경은 거지의 입술을 내려다 보면서 잠시 거리를 잰 후 눈을 질끈 감고 거지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거지는 움찔하며 몸을떨었다.희경은 잠시 그의 입술에 머문 후 곧 원위치로 돌아왔다. 『강간,살인범이 순진할 때도 다 있네요.놀랄 줄도 알고…이봐요.부탁 하나만 들어줘요.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당신이 권태로울 때마다 키스해 줄게요.』 『그거 괜찮지.』 거지가 벌떡 일어나며 희경을 안으려 했다.
희경은 거지의 손길을 피해 몸을 비키다가 기우뚱 떨어질 뻔했다.아찔한 순간 거지가 희경을 붙잡았다.
『다 늙은 몸뚱아리 가지고 빼기는….』 거지가 아쉬운듯 투덜거렸다. 『아까는 안늙었다고 하더니….』 희경이 곱게 흘겼다.
40이 다 됐다니까 정말 그런줄 아나 보지.만으로 따지면 서른다섯밖에 안됐는데….그러나 희경은 입맛을 다시는 거지를 보자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이 남자가 권태로울 때마다 키스해야 한다면 어쩌면 평생 입붙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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