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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25<스티코프비망록>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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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中央日報 현대사연구소는「46년 10월 총파업 蘇군정이 지원」「좌익계 3당 합당 蘇군정이 지시」등의 내용이 담긴『스티코프비망록 1,2권』에 이어 해방정국의 또다른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는 『스티코프비망록 3,4권』을 발굴하는데 성공했 다.비망록 1,2권 연재에 대한 학계와 독자들의 높은 관심과 격려에 힘입어 비망록 잔여분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끈질지게 추적한 결과 얻어낸 성과였다.비망록3권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중인47년 7월부터 결렬된 직후인 같은 해 10월까지를 다루고 있어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공위(共委)에서의 소련의 전략을 처음으로 밝혀주는 귀중한 것이다.4권은 북한정권 수립 전후인 48년 7월부터 10월까지 북한의 초대내각 구성등 북한정치와 경제계획수립에 소련이 깊이 개입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앞으로 2회에 걸쳐 3,4권의 내용을 분석,소개한다.
[편집자註] 「스티코프비망록 3권」은 해방정국에서 소련은 선거를 통한 한국의 정부수립에 반대해 왔다는 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미국의 제안에 따라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찬성하려고 했음을 새롭게 밝혀주고 있다.비망록에 따르면 47년5월에서 8월까지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제안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미국측의 선거실시 제안을 받아들여▲선거를 통한 헌법제정회의 구성▲미.소공위와의 협력을 통한 임시정부 조직▲의회선거 라는 수순으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타협안을 마련하고 이를 미국측에 제안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이 이같은 계획을 세우게 된 배경은 공위의 결렬이 앞으로의 상황전개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소련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정당의 공위배제를 끝까지 고집해 공위가 결렬될 경우 그 책임의 상당 몫은 소련이 져 야 하고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남한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공위의 결렬은 남한내의 좌익진영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을 불러 결국 커다란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반대로 미군정이 공위 결렬후 대중의 공감을 살만한 개혁을 단행할 경우 남한에서의 미국측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련측은 선거가 실시될 경우 북한지역내 미군의 주둔이불가피하고 이때 반동세력이 소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부정정인판단도 함께 내려놓고 있었다.또 남한의 우익진영이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선거인단을 통한 다단계 선거 실 시를 요청할 가능성에 경계를 표시했다.
소련측은 선거를 통해 헌법제정회의가 일단 구성되면 정부수립 문제를 한국인들로 구성된 헌법제정회의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헌법제정회의가 공위와의 협의를 거쳐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택하려고 했다.그 이유는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한 국인들에게만 맡길 경우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와 같은 우익측의 노련한 정치가들에게 좌익측이 말려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소련측이 이런 총선거 계획안을 작성한 시기는 제2차 미.소공위가 한창 진행중인 47년 8월이었다.이 시기는 제1차 미.소공위때와 마찬가지로 공위와의 협의대상단체 가운데 반탁(反託)을주장하는 단체의 배제문제를 놓고 미.소가 일보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던 때였다.
예컨대 소련측은 지구당이 없는 정당과 순수지역단체 및 반탁위원회의 소속단체처럼 모스크바결정을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 등을 공위와의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했다.비망록은 소련대표단의 이런 주장이 소련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미국측의 입장에서 볼때 반탁위원회 소속 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게 되면 우익측의 열세는 불을 보듯 뻔했고 더 나아가 공위에서 협상의 주도권을 상실할 수도 있었다.따라서 이 문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고 이 지점에서 협상 은 더 이상진전을 보지 못했다.
소련측 대표단은 딜레마에 빠졌다.비망록은 향후 대처방안을 놓고 소련대표단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소련측대표인 스티코프는 반탁위원회에 소속됐을지라도 모스크바 결정서의결의 목적을 지지하기로 다짐한 「공동성명 5호 」에 서명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공위와의 협의대상에 포함시키고 모스크바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분과위원회를 재개하자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제1분과 위원회 소련측위원인 둔킨은 반대했다.
그러자 스티코프는 그 다음날인 46년8월4일 소련군 정치사령관인 레베데프에게 공위 업무 진행에 관해 김일성(金日成).박헌영(朴憲永)과 협의할 것을 지시했고 이틀후인 8월6일 소련측은총선거 실시를 놓고 유.불리에 대한 검토에 들어 갔다.이때 소련측의 상황과는 별도로 미국측에서 입법기관대표 선출을 위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정식 제의해 왔다.이미 총선거를 검토하고 있던 소련측은 이에 대해 두가지 대응책을 마련했다.
먼저▲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다루는 분과위원회 활동을 재개시켜 미국측과 협상하고▲이것이 어려울 경우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헌법제정회의를 구성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타협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측은 이 타협안을 미국측에 제안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이 무렵 미군정이 본격적인 좌익인사 검거에 나서 더 이상 미국측과 협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또 한가지주요한 이유는 스티코프의 총선거 계획안에 레베데프가 반 대했기때문이다.
비망록에서 『레베데프는 신경질과 당혹감이 곁들인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이 이 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스티코프는 밝히고 있다.협상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고 공위는 끝내 결렬됐다.한반도에 냉전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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