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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비즈 북스] 책 3권 동시에 낸 노 경제학자 한 자 한 자 필생의 땀과 고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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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0년대 기술경제학을 처음 개척했던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가 평생의 연구와 사색을 집대성한 세 권의 책을 한꺼번에 펴냈다. 칠순의 노교수는 이 책들을 보기에도 촌스러운 옥색 보자기에 싸서 손수 들고 왔다. 그는 이 책들을 두고 "시대의 대작(大作)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필생의 노작(勞作)은 된다"고 했다. 그의 표정에선 미진한 연구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최선을 다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 보였다.

이 책들은 한 늙은 경제학도가 자신의 고뇌와 궁구(窮究)를 기록한 결정체다.

무려 860쪽에 이르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서울대학교 출판부)는 경제학 이론에 대한 이론서다. 내용이 너무 진지해서 딱딱하고 재미없다. 그러나 수식과 표로 도배질한 경제학의 이면에 깔린 의미를 찾는데는 다시없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여느 경제학 이론서와는 달리 자연과학과 철학, 예술적 감수성과 역사적 인식, 방법론적 엄밀성과 현실적 유용성 등 다양한 관점에서 경제학의 발전과정을 구명하고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한다. 책의 부제 '과학, 철학, 예술과 경제원리의 발견'은 저자의 이런 접근방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경제학이 '과학과 철학, 예술의 종합'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뜻 경제학과 무관해 보이는 여타 분야에 대한 이해와 천착 없이는 살아 움직이는 현실경제를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경제현실을 개선하는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그동안 경제학에 미흡했던 철학의 세계를 정리한 대작"이라고 평했고, 조순 전 부총리는 "경제원리의 과학성만을 다뤘던 경제원론과는 달리 경제학의 바탕을 이루는 철학을 깊이있게 분석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의 신자본주의 정신'(박영사)은 박 교수와 이어령 교수가 함께 집필한 한국자본주의론이다. 평생을 경제학 연구에 몰두한 박교수와 문학에서 출발해 문명비평가의 경지에 이른 이 교수는 지난 1990년부터 한국경제의 장래를 두고 토론을 거듭해 왔다. 이 책은 바로 이들 두 석학이 자신의 전문성을 한껏 발휘해 엮어낸 한국경제의 청사진이다. 이들이 얻은 결론은 한국판 자본주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의 원동력을 청교도정신에서 찾았지만 이들은 지식과 정보가 결합된 사(士).상(商)자본주의 정신을 한국경제의 버팀목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특히 경제사에 대한 박 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동서고금의 문화와 역사를 넘나드는 이 교수의 입심이 그대로 녹아있어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긴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한국 지식인에게 고(告)함'(박영사)은 작금의 한국사회, 특히 지식인사회에 대한 저자의 충심어린 비판이자 경고장이다. 저자는 일부 지식인들의 반지성적, 역사퇴행적, 국수주의적 편견이 나라의 발전에 족쇄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젊은 지식인들이 부(富)와 권력과 명예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 사회적.시대적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일갈한다.

분야가 다른 이 세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을 하든 건전한 정신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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