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아이] 바둑판에 그린 ‘신조선책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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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대학노트 크기의 작은 체스판 위에 올려놓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집권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그는 유라시아에서 중국·러시아·일본·이슬람이 미국의 대항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분석하고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을 제시했다. 『거대한 체스판』이 국내에 소개됐을 때 탁월한 상상력과 혜안에 감탄한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또 다른 각도로 주목한 것은 브레진스키가 폴란드 태생으로 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사실이었다. 강대국 독일과 소련의 틈바구니에 끼여 외침에 시달렸던 나라에서 태어난 인물이 세계 전략을 논하는 국제정치학계의 거두가 된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폴란드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이 열강에 치여 살아온 한반도와 너무 많이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 『조선책략』의 저자 황쭌셴(黃遵憲)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사관이었다. 외교관으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그는 파격적 문체로 기성 시단(詩壇)에 활력을 불어넣은 문인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중국·일본·조선이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한 조선책략의 내용도 파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1880년 고종은 김홍집이 일본에서 입수한 이 책을 펼쳐들고 깜짝 놀랐다.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이란 아홉 글자가 고종의 미간을 자극했다. 고종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외교는 결국 실패했다. 외교전략 참고서의 내용이 신통찮아서였을까. 아니면 무기력한 조선으로선 역부족이었을까.

이명박 정부는 조선이 망한 지 약 100년 만에 출범한다. 100년간 한반도를 둘러싼 4대국의 상대적 위상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이고, ‘늙은 호랑이’ 중국은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돌아왔고, 러시아는 옛 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4대 강국이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지정학의 본질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지만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4대 강국과의 관계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새 정부의 4강 외교전략은 무엇인가. 새 정부에는 한반도를 에워싼 4강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고 10수, 100수 앞을 내다볼 외교전략이 있나.

외교안보연구원 김흥규 교수가 최근 펴낸 짤막한 보고서(『한·중 관계와 새 정부의 대중정책』)에서 4강 외교의 핵심인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한 ‘신조선책략’의 단초를 발견했다. 김 교수는 ‘창조적 실용주의 외교’를 주문했다. 대통령이 강조한 실용주의에 ‘창조적’이란 수식어가 더해졌다. ‘제로섬(zero-sum)외교’에 머물지 말고 ‘포지티브 섬(positive-sum) 외교’를 펼치라는 주장도 눈에 띈다.

친미원중(親美遠中)을 넘어 연미통중(聯美通中)하라는 대목은 촌철살인이다. 미국과 연대를 강화하되 과도한 친미를 경계하고, 중국과는 소통을 강화하라는 뜻이다. 보고서를 보면서 ‘친구 여러 명을 동시에 두루 잘 사귀는 법’을 새 정부가 익혀야 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다소 소원했던 옛 친구와는 우정을 다시 돈독하게 하면서도, 최근에 사귄 친구가 소외감을 느끼거나 섭섭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섬세한 외교 예술(art) 말이다.

미국 대통령의 워싱턴 별장에 초대받아 우아한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이벤트는 분명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친구가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새 주중대사는 이런 맥락 속에서 골라야 한다.

장세정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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