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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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그것은 신전재판(神前裁判)이었다.
솥에 물을 담아 팔팔 끓인다.거짓말했음직한 백성을 모아 그 열탕에 손을 담그게 한다.「거짓말 한 자의 손은 화상을 입어 뭉개지고,거짓말 안한 자의 손은 말짱하다」는 것이다.죄의 유무를 가리는 가혹한 재판이었다.
5세기의 왜왕 윤공(允恭)은 이 아마가시 언덕에서 재판을 했다.신성한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라 안엔 성씨(姓氏)를 사칭하는 자가 많아 조정(朝廷)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고대에 있어 성씨는 신분의 상징이었다.업적이나 출신 성분에 따라 성씨가 하사되곤 한 탓이다.
그래서 백성 중엔 성씨를 사칭하여 행세하는 자가 적지 않았고,그로 인한 폐해도 많았다.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문서 등의 증거도 없어져 그 진위(眞僞)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윤공왕은 비상수단을 강구했다.공포분위기의 조성이었다.
미리 겁을 먹은 사칭자들은 사전에 이실직고(以實直告)하여 성씨 바로잡기는 어렵잖게 이룩됐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보인다고 한다.
남편이 메모지를 읽었다.
『구가타치(くがたち).』 그 재판은 「구가타치」(區訶陀智.盟神探湯)라 불렸다는 것이다.
『무슨 뜻이에요?』 『글쎄?』 『그 일본식 이두(吏讀)표기를우리식으로 읽으면 「구가타지」예요.「타지」는 우리말 「따짐」의옛말이 아닐까요?』 『따짐?』 『네.「따진다」는 뜻의 명사 말예요.』 『그럴듯해.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이 재판이니까-『그럼 「구가」는 뭘까?』 『구가,구가….』 길례는 한참 읊조리다 소리쳤다.
『아,「끓가」! 경상도 사투리에 「끓가」라는 말이 있잖아요?「끓여서」「끓이고」의 뜻이죠.그리고 「끓가」의 옛소리가 「글가」「긋가」예요.이 소리를 한자 표기한 것이 「구가(區歌)」가 아닐까요?』 『끓가 따지-.끊여서 따진다 이거지? 그럴지도 모르겠어.그런데 경상도 사투리라는 점이 아주 재미있군.그 왕은 지병(持病)이 있어서 늘 골골했는데,신라에서 온 의사가 지은 약을 먹고는 나았다거든.신라계의 왜왕이었을까? 아니면 가야계 ?』 『우리 고대어를 요즘의 감각으로 대하면 대체로 경상도 사투리 비슷하니까 반드시 신라.가야계로 단정지을 순 없을지도 몰라요.어떻든 그분은 우리 조상이죠.』 길례를 보는 남편 얼굴에공감과 사랑의 표정이 역력했다.
손 잡고 언덕을 내려왔다.
내일은 교토(京都)로 간다.그곳 광륭사(廣隆寺)엔 일본 국보제1호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있다.전부터 길례가 보고싶어 한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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