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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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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1817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을 방문했다. 공연 관람을 끝낸 후 그는 이 극장이 이 전세계 오페라 가수와 애호가들의 메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프랑스) 극장들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사는 1778년 극장 완공을 몇달 앞두고 “새 극장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의 예견은 적중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권위있는 오페라극장으로 자리잡았고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빈 슈타츠오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파리 오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많은 성악가들은 라 스칼라 극장 데뷔를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라 스칼라는 ‘벨칸토의 전당’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꿈의 무대, 오페라의 메카다.

밀라노에 처음으로 극장이 들어선 것은 1598년의 일이다. 팔라조 레알레 궁정에 들어선 ‘살로네 마르게리타(Salone Margherita)’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 마르게리타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즉위한 스페인 왕 필리포 3세의 부인이다. 1600년대 초반 ‘마넬리의 아드로메다’등 몇편의 오페라가 상연됐다.

1686년 ‘테아트리노 델라 코메디아(Teatrino della Commedia)를 오페라 극장으로 개조한 다음부터 밀라노에서는 오페라 상연 회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708년 1월 5일 ‘살로네 마르게리타’가 화재로 소실된 뒤 게롤라모 콰드리오(Gerolamo Quadrio)의 설계로 소극장을 급히 지었다. 1708년 6월 21일에 개관으니 불과 6개월만에 완공한 셈이다. 이 극장은 매우 비좁았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무대

오페라 애호가 귀족들이 박스석 분양 조건으로 건축

밀라노의 귀족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밀라노를 넘겨받은 오스트리아로부터 극장 신축 허가를 받아냈다. 지안 도메니코 바르비에리의 설계로 1717년 12월 26일 ‘테아트로 레지오 두칼레’(Teatro Regio Ducale)가 문을 열었다.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 페르디난도 대공의 이름을 땄다. 오페라 극장의 박스를 분양받았던 밀라노의 귀족들이 건축비를 댔다. 대대로 박스석을 소유한 사람들을 가리켜 palchettisti라고 한다. 개관 공연은 카르파리니의 ‘콘스탄티노’로 막이 올랐다.

1770년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음악여행을 떠난 영국 음악학자 찰스 버니는 밀라노 레지오 두칼레 극장에서 받은 인상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보기엔 이곳은 오페라 감상보다는 사교를 위한 공간이었다. 관객들은 공연 도중 음식을 먹기도 하고 카드놀이를 즐기면서 매우 시끄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리아나 2중창을 부를 때도 소란은 게속됐다. 하지만 아리아나 2중창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가수가 앙코르를 연주할 때까지 박수갈채는 계속됐다. 관객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아리아를 앙코르로 청해 들었다.

비극으로 끝나는 오페라 세리아는 사육제 기간에만 상연되었고 그 외의 기간 동안에는 코믹 오페라가 상연됐다. 찰스 버니는 당시 가스만(Gasman)의 ‘L’amore artigiano’를 관람했는데 공연은 오후 8시에 시작해서 자정에 끝났다. 공연은 금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녁에 열렸다. 시즌은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귀족 30명이 제작비를 댔다. 박스석 하나에 70 제키노를 냈다. 나머지 박스석은 위치에 따라 30∼50 제키노를 냈다. 박스석은 2∼6층에 각 36개씩 있었다. 박스석의 최대 인원은 6명. 가장 싼 자리는 1층(orchestra)와 갤러리 석(piccionaia)이었다. 막간에는 1층 관객들도 갤러리 석으로 가서 여기저기 두리번 거렸다. 5층 박스석 출입문은 공연 도중에도 파로(은행이 물주가 되는 카드 게임)를 즐기기 위해 항상 열려있었다.

레지오 두칼레 극장은 개관 후 59년 동안 포르포라, 알비노니, 파이지엘로, 핫세, 피치니, 스카를라티, 갈루피 등의 오페라를 초연했다. 1772년 모차르트의 오페라‘루치오 실라’가 초연된 극장이기도 하다. 가스파로 파치아로티, 주제페 파리넬리, 조반니 만주올리, 루이지 마르케시 등 유명 카스트라토 등이 무대에 섰다.

1776년 2월 26일 카니발 시즌에 Traetta의 ‘La Merope’ 공연이 끝난 다음 발생한 화재로 목조 극장이 송두리채 불에 타고 말았다. 극장을 밝혔던 촛불을 완전히 끄지 않았던 탓이다.

오스트리아 정부, 페르디난드 대공, 오스트리아 여제, 밀라노 공작 부인 마리아 테레사, 불에 탄 레지오 두칼레 극장의 박스석의 소유권을 갖고 있던 귀족 90여명 사이에 오랜 협상 끝에 2개의 극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사육제 기간에 오페라 세리아를 상연할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일명 Teatro Grande), 코믹 오페라를 상연할 ‘테아트로 피콜로’(일명 Teatro Piccolo)를 짓기로 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14세기에 건축돼 낡아 빠진 ‘산타 마리아 알라 스칼라’성당 자리에 짓기로 했다. 1776년 8월 성당 건물을 허물고 라 스칼라 극장을 지었다. 이번에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돌로 짓다보니 건축기간도 오래 걸렸다. 주제페 피에르마리니의 첫 설계안은 오스트리아 총독 피르미안 백작에게 거부당했다. 두번째 설계안은 1776년 마리아 테레사 여제가 승인했다. 무대는 당시 이탈리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프로세니엄의 너비는 26m, 높이 27m, 깊이 20m였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객석

그 사이에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목조 건물에 구리 지붕을 얹은 가설 극장 ‘Teatro Internale’를 지었다. 120개의 박스석을 임시로 만들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건축 디자인을 맡은 주제페 피에르마리니가 설계해 1776년 9월 13일 문을 열었다.

‘누오보 레지오 두칼레 테아트로(Nuovo Regio Ducale Teatro)’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이 극장은 얼마 후 이 자리에 있던 교회당의 이름을 따서 Teatro alla Scala로 이름을 바꿨다. 1778년 8월 3일 개관 작품은 살리에리의 ‘유럽의 발견’(Europa Riconosciuta). 당시 유럽 정상급 카스트라토 가스파로 파치아로티가 출연했다. 원래 크리스토프 글룩에게 작품을 위촉했으나 거절당했다.

개관 공연에는 페르디난드 대공, 그의 부인인 마리아 리치아르디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모데나 공주 등이 참석했다. 공연 팸플릿에는 오페라 제목보다 참석한 귀빈의 이름이 더 큰 글씨로 씌어 있었다. 작곡자나 가수의 이름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개관 당시 현지 언론은 극장의 파사드(정면 외관)보다는 화려한 내부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었다. 파사드는 교회당의 측면이 있던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광장이 아닌 거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웃에 인접한 건물들을 헐고 현재의 광장을 만든 것은 1858년의 일이다. 화려한 극장 내부와는 대조적으로 외관은 검소하게 꾸며졌다. 개관 당시 객석 1층에는 고정석이 없어 600여명이 벤치에 앉거나 서서 관람했다.

박스석 위에는 갤러리석(loggione)을 만들어 호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이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열렬한 오페라팬들이 즐겨 찾는 자리다. 가수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비난 또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이곳이다. 가수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살벌한 곳이다. 라 스칼라 극장의 갤러리석은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담금질되는 뜨거운 시련의 장소다. 여기서 참담한 실수를 경험하면 오래 기억된다.

개관 당시에는 촛불로 조명을 밝혔으나 1787년 기름 램프로 교체했다. 996개는 천장과 벽에 달았고 84개는 무대 뒤에 배치됐다. 화재를 막기 위해 수백개의 물통을 곳곳에 배치했다. 무대막 그림은 ‘파르나수스 산의 뮤즈신들’. 도메니코 리카르도의 작품이다.

오페라 공연 도중 박스석에서 도박판 벌여

라 스칼라 극장의 공연 포스터

건축비는 4억 리라가 들었다. 박스석을 분양받은 귀족들이 건축비를 댔다. 박스석은 개인 소유의 살롱이 되어버렸다. 매일 저녁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 카드 놀이를 즐겼다. 유명 아리아가 연주될 때나 스펙터클한 무대가 펼쳐질 때, 좋아하는 가수가 무대에 설 때만 잠시 무대쪽으로 눈과 귀를 돌릴 뿐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오페라 극장이 그랬듯 라 스칼라에도 개관 당시 카지노를 겸했다. 도박꾼들은 로비에 앉아 열심히 카드를 돌렸다.

박스석은 주인의 취향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장식되었다. 비단, 타피스트리, 또는 좋아하는 오페라 장면으로 박스석 벽면을 장식했다. 프레스코 천장 벽화, 거울, 목재 조각품 등이 박스석 천장을 수놓았다. 박스석은 객석 다른 곳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아예 차단막을 내리고 ‘은밀한 일’을 벌여 온갖 소문의 낳았다. 박스석 앞에는 자기 가문의 문양을 걸기도 했다. 막간에는 박스석 로비는 gioco d’azzardo라는 도박판으로 바뀌었다. 이 도박으로 극장은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딱딱한 나무 벤치 의자를 놓은 1층 객석에는 주로 군인이나 귀족의 몸종들이 앉았다. 관람 태도도 불량했다. 대부분이 술에 만취된 상태였으며 떠들썩한 난장판을 연출했다. 연주 도중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게 예사였다. 가수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신이 날 때는 박수를 치는 대신 지팡이로 나무 벤치를 두드리기도 했다. 하류층은 주로 객석 맨꼭대기 갤러리석에 앉았다. 박수를 치는 대신 무대로 종이를 날렸다. 그래서 관객의 무분별한 행동을 나무라는 관람 수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연주 도중 야유를 보내거나 박수, 앙코르 요구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1796년 5월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라 스칼라 극장 박스석에서 귀족 가문의 문양을 떼버렸다. ‘야만과 노예 시대의 잔재’라는 이유에서다. 발코니석 중앙의 로열 박스도 다섯 개의 박스석으로 쪼갰다. 하지만 1799년 오스트리아가 다시 밀라노를 통치하면서 귀족 문양과 중앙의 로열 박스를 복원했다. 오스트리아는 밀라노를 통치할 때 시민들이 훌륭한 공연을 저렴하게 볼 수 있도록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밀라노 시민들이 매일밤 오페라에 푹 빠져들어 독립운동이나 반정부 테러 같은 것은 꿈꿀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1801년 주제페 카르나노는 오페라를 좋아하는 귀족들을 규합해 포르토 로마냐에 극장을 짓기로 했다. 성 라자로 수도원이 있던 자리를 매입했다. 라 스칼라 극장과 칸노비아나 극장을 모델로 루이지 카노니카가 건축 설계를 했다. 1200∼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 극장은 페데리치의 ‘자이라’초연과 함께 1803년 9월 3일 개관했다. 그후 도니제티의‘안나 볼레나’‘몽유병의 여인’등이 초연됐다. 1850년부터는 오페라와 함께 연극, 서커스, 밴드 공연을 위한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전경

라 스칼라 극장이 처음 개ㆍ보수 공사에 들어간 것은 1807년. 조반니 페레고, 가에타노 바카리, 안젤로 몬티첼로 등이 감독을 맡았다. 1814년에는 피에트로 카노니카의 감독 하에 무대를 확장했다. 샹들리에는 알렛산드로 산키리코의 설계로 1823년 설치됐다. 개스 조명은 1860년, 전기 조명은 1883년에 각각 도입됐다.

1897년 밀라노 시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면서 극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극장 정문 앞에는 이런 안내문이 걸렸다. “라 스칼라는 시민의 자존심, 양심, 모든 예술적 감각의 죽음을 맞아 문을 닫습니다.”

귀토 비스콘티 공작이 팔걷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는 박스석 소유권자들로 ‘주식회사’(Societa Anonima)를 결성해 오페라 극장 문을 다시 열었다. 줄리오 가티 카사자를 총감독,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

1907년 라 스칼라 극장은 6층 박스석을 헐고 갤러리석으로 바꿨다. 오케스트라 피트(golfo mistico)도 추가했다. 이때까지는 객석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다.

1913년 3월 8일 라 스칼라 극장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파리 출신의 골동품상 쥘 상봉(Jules Sambon)의 컬렉션을 사들였다. 별관에 위치한 박물관에는 베르디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무대의상, 악보, 회화, 박물관은 2002년 5월 23일 팔라조 부스카로 옮겼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1918년 우베르토 비스콘티는 ‘주식회사 라 스칼라 극장’의 회장에서 물러났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이탈리아 전역을 강타한 경제 위기 때문이다. 그의 사퇴 선언과 함께 극장은 문을 닫았다. 1921년 라 스칼라 극장은 정부 지원을 받는 공사(公社. ente autonomo)로 바뀌었다. 박스석 소유자들은 소유권을 밀라노 시에 넘겼다. 중앙과 지방 정부의 재정 지원, 매표 수익 덕분에 라 스칼라 극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

1943년 8월 15일 밤 영국군의 공습으로 라 스칼라 극장은 부서졌다. 외벽만 남고 지붕과 갤러리, 박스, 무대의 일부가 내려앉았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밀라노가 입은 최대의 손실은 우리의 위대한 오페라 극장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수많은 공연의 추억으로 수놓인 극장은 거대한 지옥으로 바뀌었고 1층 객석은 돌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붕괴 위기에 직면한 건물은 부서진 잔해를 치우고 비를 막기 위해 임시로 지붕을 덮었다. 루이지 세키가 원래의 설계대로 극장을 복원하는 일을 맡았다. ‘Com‘era, dov’era’(원래 있던 장소에, 원래 있던 모습으로)를 모토로 내걸었다. 재건축 예산은 축구경기 입장료 수익과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 지방 정부의 오락세 중 2%를 보태 마련했다.

1946년 5월 11일 재개관 기념 갈라 콘서트에서 토스카니니는 베르디, 로시니, 보이토, 푸치니를 지휘했고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가 독창자로 출연했다. 1946년 12월 26일 정규 시즌 개막 작품은 베르디의 ‘나부코’였다. 재개관 때까지 오페라는 테아트로 소시알레(코모), 테아트로 도니제티(베르가모), 테아트로 리리코(밀라노) 등에서 상연됐다.

1950년대부터 16세기, 17세기 실내 오페라와 현대 오페라를 상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500석짜리 ‘라 피콜라 스칼라’극장이 탄생됐다. 피에로 포르탈루피, 마르첼로 자벨라니 로시가 설계한 이 극장은 1955년 12월 26일 Giorgio Strehler의 ‘Il matrimonio segreto’로 문을 열었다. 1998년 10월 16일 ‘누오보 피콜로 테아트로’가 문을 열면서 현대 오페라를 상연했으며 2002년 스칼라 극장 개보수와 함께 피콜라 스칼라 자리는 라 스칼라 극장의 무대 보관소로 바뀌고 말았다.

밀라노 아르킴볼디 극장 무대

1957년 1월 6일 토스카니니가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라 스칼라 극장을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게 한 지휘자다. 그의 유언대로 유해가 밀라노로 옮겨졌다. 그의 시신은 라 스칼라 극장 안마당에서 조문객들을 맞았다. 그가 잠든 관이 오페라 극장을 떠날 때 지휘자 데 사바타는 텅빈 극장에서 베토벤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했다. 음악은 스피커를 통해 바깥 스칼라 광장에 울려 퍼졌다. 수천명의 시민들이 토스카니니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1990년대말 오페라 극장이 ‘공사’에서 재단법인(fondazione di diritto privato)으로 바뀌면서 정부 지원금이 대폭 삭감되는 대신 민간의 기부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Milano per la Scala’라는 재단법인이 극장 운영을 맡고 있다. 합창단, 오케스트라, 스태프 등 극장에 근무하는 상근 직원만 1000여명에 이른다.

1990년대말 라 스칼라 극장의 파사드는 품격있는 베이지색의 옛 모습을 회복했다. 객석도 개보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1946년 재개관 이후 한번도 시설 보수공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낡은 무대기계를 첨단 설비로 교체하고 비좁은 백스테이지와 무대 보관소를 넓혀야 했다. 새로 바뀐 소방법에 대응할 수 있는 시설 보완도 필요했다. 연습실이나 사무공간도 협소했다.

백스테이지, 연습 공간 확충 위해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

라 스칼라 극장은 2001년 12월 7일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한 ‘오텔로’ 공연을 마지막 시즌을 끝냈다. 2002년 1월 19일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설계로 개보수 공사에 돌입했다. 예산은 5400만 달러. 프랑코 말그란데가 설계한 무대 타워는 피에르마리니가 설계한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사드 뒤에 우뚝 세워졌다. 또 다른 타원형 타워에는 출연자 대기실과 행정 사무동, 출연자용 식당, 분장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물탱크 2개를 없애려고 했으나 이탈리아 문화재청 차관 비토리오 스가르비를 비롯해 TV 앵커, 미술평론가, 오페라 연출가 등이 반대 의견을 냈다. 80세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밀라노 오페라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그가 특히 반대했다. “불쌍한 피에르마리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라 스칼라를 살리자’(Salviamo La Scala)회원들은 시청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건 복원이 아니라 파괴다.”

라 피콜라 스칼라를 허물고 백스테이지를 확충하는 과정에서 옛 모습을 훼손한다며 일부에서 법정 소송을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화재와 안전 문제로 인해 입석이 대폭 줄어들었다. 입석 애호가(logginisti)들이 법정에 호소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극장 측은 그 대신 모든 공연마다 맨꼭대기층에 140석을 데이 티켓(당일 판매분)으로 내놓기로 했다.

라 스칼라 극장 개보수 공사와 관련해 이탈리아 정치권은 양분됐다. 베를루스코니 수상이 속한 ‘포르자 이탈리아’당 소속 가브리엘레 알베르티니 밀라노 시장과 라 스칼라 극장 총감독 카를로 폰타나는 마리오 보타의 설계안을 적극 지지했지만, 마르게리타 당 소속의 밀라노 시의원 피에로 루텔리와 이탈리아 문화재 당국은 반대했다.

그동안 백스테이지 공간이 협소하고 무대 세트 보관 공간이 부족해 연간 공연회수는 90회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보수 공사로 인해 연간 160회로 공연 회수가 늘어났다.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깊이 48m에서 70m로 넓혔고 무대 타워도 35m에서 40m로 높였다. 이밖에도 사무실과 7개의 연습실 등 다양한 서비스 공간을 확충했다.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자막을 골라 볼 수 있는 전자자막을 객석 의자에 설치했다.
하지만 측면 발코니석에서의 악명 높은 시야 장애는 개선되지 않았다. 2289석 중 154석은 여전히 시야 장애석으로 남아있다. 객석 바닥의 두터운 붉은 색 카펫을 걷어내어 음향은 훨씬 나아졌다. 지금도 2층 갤러리의 왼쪽이 가장 음향이 좋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밀라노 아르침볼디 극장 전경

개보수 공사 3년간 아르침볼디 극장에서 공연

개보수 공사 기간 라 스칼라 극장의 공연은 밀라노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7.2㎞ 떨어진 비코카에 있는 테아트로 아르침볼디에서 열렸다. 자동차 타이어 회사 피렐리가 옛 공장 부지에 지은 극장이다. 비토리오 그레고티(Vittorio Greggotti)가 설계를 맡아 부채꼴로 지은 2375석짜리 극장이다. 지금도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서 아르침볼디로 향하는 왕복 셔틀 버스가 출발한다. 개보수 공사 기간 동안 라 스칼라 극장 티켓만 있으면 이 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인근 아제오 전철역에선 극장 관객을 위한 무료 특설 열차도 운행했다.

2001년 1월 19일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으로 개관한 아르침볼디 극장. 이곳은 원래 귀족 가문 아르침볼디 소유의 땅이었다. 세계적인 타이어 제조업체인 피렐리가 사들여 공장 부지로 사용해왔었다. 그러던 차에 라 스칼라 극장 개ㆍ보수 공사 계획이 발표되면서 임시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2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끝에 개관한 것이다. 피렐리 사는 밀라노 시의회에 2800만 유로에 땅을 팔았다. 하지만 밀라노 시의회는 대지 구입에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피렐리사가 도시 재개발 수익금 1800만 유로, 협찬금 1000만 유로를 내는 것으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총공사비는 4400만 유로(약 600억원). 라 스칼라 극장 개보수 비용(6700만 유로)보다 적다. 건축비는 밀라노 시에서 부담했다. 객석 1개당 공사비는 1만8500 유로(약 2500만원)다. 7년 걸려 완공된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2700석.사무실ㆍ주차장 포함)의 객석 1개당 공사비 37만 유로(약 5억원)의 5%에 불과할 정도로 싼 가격이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만큼 저렴하게 지은 극장이다. 비토리오 그레고티가 설계를 맡았다.

아르침볼디 극장의 명물은 객석 양옆 벽면에 부착돼 있는 90개의 대형 유리 판넬이다. 오페라ㆍ콘서트 등 공연장르에 따라 자유자재로 각도를 달리해 움직이도록 돼 있는데 잔향(殘響)시간을 조절하며 막간에는 조명 역할까지 맡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ㆍ빈 슈타츠오퍼 등에서 선보인 개인용 비디오 자막도 설치돼 있다.

재개관 공연 티켓 최고 가격은 300만원

밀라노 아르침볼디 극장 로비

개보수 공사를 끝낸 라 스칼라 극장은 2004년 12월 7일 3년만에 다시 문을 열어다. 재개관 작품은 1778년 라 스칼라 극장 개관 때 초연된 다음 한번도 상연되지 않은 살리에리의 ‘유럽의 발견’.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봉을 잡았다. 작품 자체보다는 25개의 장면이 빠르게 바뀌는 첨단 무대기술을 마음껏 선보이기 위해 고른 작품이었다. 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살리에리가 아니라 새로 단장한 라 스칼라 극장이었다.

라 스칼라 극장 시즌 개막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광장 앞을 가득 메운 시위대와 경찰이다. 재개관 개막 갈라 공연 티켓은 최고 2000 유로(약 300만원)을 호가했다. 밀라노 사교계를 주름잡는 내로라 하는 부호와 명사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배우 소피아 로렌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함께 극장 앞에 도착했다. 모피 코트 차림에 보석을 달고 가슴이 푹 파진 드레스를 입었다. 때맞춰 동물 보호주의자들은 관객들이 입고 온 모피 코트 반대시위를 벌였다. 모차르트 음악을 경적으로 울리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문화예술에는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도 실업 등 다른 사회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시위대도 있었다. 경찰 병력 500여명이 투입됐다. 알파 로메오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 당한 노동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2001년 11월 이탈리아 저작권협회(SIAE)가 발표한 2000년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인들은 축구 경기 관람을 위해 연간 2억 320만 유로를 쓴다. 공연예술 관람을 위한 가구당 평균 예산은 1억 6340만 유로. 발레ㆍ오페라 관람에는 7540만 유로. 대중음악 콘서트에는 9140만 유로. 클래식 콘서트에는 4230만 유로를 쓰는 것으로 집계됐다. 영화 티켓은 1억300만장(5억1650만 유로어치)가 팔려나갔다.

라 스칼라 극장의 티켓은 거의 전석 매진된다. 150여년의 역사를 통해 350여편의 오페라를 초연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베르디가 쓴 다수의 오페라를 초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2년 ‘아이다’의 유럽 초연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베르디도 한때 자기 작품을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하는 것을 거부한 적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자기 음악을 마음대로 고치고 자르고 하는 등 작품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라 스칼라 극장 역사에서 한 가지 오점이 있다면 1935년 무솔리니와 파시즘을 찬양한 마스카니의 ‘네로네’를 상연했다는 점이다.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은 전통적으로 밀라노의 수호성인인 성 암브로시아 축일인 12월 7일에 시작한다. 모든 공연은 아무리 길어도 자정을 넘겨서는 안된다. 상연 시간이 긴 오페라는 개막 시간을 앞당긴다. 공연이 일단 시작되면 티켓을 소지한 관객이라도 절대 입장할 수 없다. 극장 정면에는 베르디, 도니제티, 벨리니, 로시니의 실물 크기의 동상, 푸치니, 마스카니, 조르다노의 흉상이 로비에 있다. 극장 내부는 온통 빨강색이어서 여성들은 빨강색을 입는 것이 금기처럼 되고 있다. 드레스가 돋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공식 명칭: Teatro alla Scala

◆개관: 1778년 8월 3일(2004년 12월 7일 재개관)

◆건축가: 주제페 피에르마리니 (1778년), 마리오 보타(2002년 개보수)

◆음향 컨설턴트: Higini Arau(2002년 개보수)

◆홈페이지: www.teatroallascala.org

◆객석수: 2800석

◆부대시설: 라 스칼라 극장 박물관

◆시즌: 12월 7일부터 이듬해 11월(8월은 휴관)

◆초연: 살리에리‘유럽의 발견’(1778년), 로시니‘이탈리아의 터키인’(1814년)‘도둑까치’(1817년), 벨리니‘노르마’(1831년), 도니제티‘루크레지아 보르지아’(1833년)‘마리 스튜어트’(1835년), 베르디‘오베르토’(1839년)‘하루만의 임금님’(1840년)‘나부코’(1842년)‘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인’(1843년)‘잔다르크’(1845년)‘오텔로’(1887년)‘팔슈타프’(1893년), 보이토‘메피스토펠레’(1868년), 폰키엘리‘라 지오콘다’(1876년), 카탈라니‘라 왈리’(1892년), 조르다노‘안드레아 셰니에’(1896년), 칠레아‘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1902년), 푸치니‘에드가’(1889년)‘나비부인’(1904년)‘투란도트’(1926년), 마스카니‘파리의 아가씨’(1913년), 레스피기‘루크레지아’(1937년), 스트라빈스키‘미사’(1948년), 칼 오르프‘아프로디테의 승리’(1953년), 미요‘다비드’(1955년), 풀랑크‘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1957년)

◆역대 음악감독: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툴리오 세라핀, 빅토르 데 사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상주단체: 라 스칼라 오페라단,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2년 창단. 수석지휘자 리카르도 무티)

◆소재: Via Filodrammatici 2 / Piazza della Scala, 20121 Milano

◆전화: +39 (0)2 860775

◆교통: 지하철 1호선

□ 밀라노의 다른 극장들

⊙ 칸노비아나 극장(Teatro della Cannobiana)=라 스칼라 극장 개관 이듬해인 1779년 8월 살리에리의 ‘베네치아의 축제’(La Fiera di Venezia)공연과 함께 문을 열었다. 이 극장도 피에르마리니가 설계했다. 1832년 5월 12일 초연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금은 잊혀진 1800년대 이삼류 작곡가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바카이의 ‘줄리엣과 로미오(Guilietta e Romeo)’다. 어떤 사람은 바카이를 도니제티ㆍ벨리니와 견줄만한 작곡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전설적인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은 벨리니의 ‘캐퓰릿가와 몬테규가’에 출연할 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4막 대신에 바카이의 ‘줄리엣과 로미오’의 3막을 부르기도 했다.

⊙ 테아트로 만조니=1850년 5월 15일 ‘테아트로 델라 코메디아’(1050석)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주로 연극 무대로 쓰인다. 일요일 오전에는 재즈 콘서트도 열린다. 지하철 Montenapoleone역 하차. www.teatomanzoni.it

⊙테아트로 달 베르메(Teatro dal Verme)=1872년 마이어베어의‘위그도 교도’로 문을 열었다. 푸치니의 ‘르 빌리’, 레온 카발로의‘팔리아치’가 초연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무명 작곡가들의 초연 무대로 사용됐다. 20세기초 영화관으로 개조했다가 1950년대부터는 뮤지컬 공연이나 정치 집회 장소로 사용돼 왔다. 1964년에는 에르네스토 로저스, 마르코 자누소 등이 소극장 오페라 무대로 개조하자는 의견을 내놨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81년엔 밀라노 시가 이 극장을 사들여 1420석짜리 콘서트홀(www.dalverme.org)로 꾸며 2001년 4월 5일 재개관했다.

⊙테아트로 리리코(Teatro Lirico)=1894년 칸노비아나 극장(Teatro Cannobiana)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칠레아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 아를의 여인’(엔리코 카루소가 주인공 페데리코 역 맡음), 조르다노‘페도라’, 레온카발로 ‘자자’등의 오페라를 초연했다. ‘테아트로 리리코’로 이름을 바꾼 다음부터는 다수의 현대 오페라를 초연했다. 1998년부터는 주제페 베르디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극장 운영을 맡고 있으며 현대무용과 클래식 음악 공연을 해오고 있다.

⊙테아트로 카르카노(Teatro Carcano)=1904년 문을 닫았다가 10년 뒤 나자레노 모레티가 개보수해 다시 문을 열었다. 1946년에는 박스석을 없애고 발코니석을 넓혔다. 1948년 10월 재개관할 때는 음악, 무용, 시, 오페레타 등 4개 예술(Le 4 arti)라는 제목의 축제를 벌였다. 1950년대부터는 실험극이 상연됐고 1965년부터는 연극 전용극장으로 쓰이고 있다. www.teatro.carcano.com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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