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수영화산책>닥터 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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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홀아비 치과의사가 집안에서 외간여자와 정사를 벌이던중 소풍간줄 알았던 어린 아들이 갑자기 나타나 크게 당황한다.부랴부랴 여자를 침대에 숨기고 문을 열어주는데 사정을 뻔히 아는 여덟살난 아들이 천연스레 하는 말이 걸작이다.『아빠 왜 땀흘려.』 순간 극장안은 폭소의 도가니가 된다.
『닥터 봉』은 온통 치기(稚氣)가 넘치는 코미디다.신세대 부자와 노처녀등 3인이 벌이는 신세대놀음인데 영악한 꼬마 하나를사이에 놓고 이웃간의 젊은 남녀가 아옹다옹하는 내용이다.철든 어른의 사랑싸움이야 유치하건 말건 상관없으나 철 들기 전의 어린애를 영악하게 만들어 손님을 끄는 것은 아무리 코미디라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스크린에 등장하는 꼬마 주인공을 앙증스럽고 버릇없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됐다.그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거개가 어린이의 순수함을 그리는 것에 인색하고 어른을 골탕먹이는 재주가 뛰어나야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다.하긴 일반 관객의 생각이 그러하니 본전뽑기 위해서도 그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린이의 영악함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꾸며진 영화다.
젊은세대의 유쾌한 언어감각을 맛볼 수 있고 10년전에는 상상도못했을 세태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영화속의 내용도 그렇지만 유치함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즐기는 젊은 관객 들의 태도 역시 흥미의 대상이다.그들은 어린애가 아빠를 데리고 놀건 말건 현장에서 웃고 즐기면 그만이며 이 여자 저여자 넘나드는 주인공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기색이다.
닥터 봉의 모습은 현대젊은이의 한 단면인지도 모른다.이성은 잠자리 파트너로 족하며 사랑이나 결혼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이 강하다.한차례 뜨거운 밤을 보낸 아침이면 주섬주섬 옷을차려입고 훌훌 제 갈길로 떠나는 모습에는 돈과 집이 있는데 왜한사람에 얽매여 사느냐는 투의 자유분방함이 넘친다.
그러나 이 천하의 난봉꾼도 한국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종국에 가선 어린 아들의 통사정으로 평소에 티격태격하던 이웃처녀를 새엄마로 맞아준다.그렇게 정석으로 돌아갈 바엔 애초부터 어린애를 어린애답게 그렸어야 했을 것이다.
편집담당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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