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승의 ‘공천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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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右)가 4일 오후 서울 당산동 당사에서 공천기준 최종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강정현 기자]

4일 오전 통합민주당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의 폭탄 선언이 당을 발칵 뒤집어놨다. 이날 ‘비리·부정 인사’에 대한 구체적 심사 기준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공심위 회의에서 부정·비리 관련 인사 중 금고형 이상의 처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공천에서 탈락시키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 주장대로라면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홍업·이용희 의원, 신계륜 사무총장, 안희정 전 참평포럼 집행위원장 등 당내 주요 인사들이 공천을 못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당장 한 석이 아쉬운 마당에 지역 경쟁력을 갖춘 인사들을 당이 스스로 배척하는 결과인 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총선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도 걸림돌이 된다. 대선 때 궂은 일을 도맡았다가 피해 본 사람들을 당이 외면해선 안 된다는 동정론도 만만찮다. 이 때문에 그동안 당 출신 공심위원들은 개인 비리와 대선 자금 관련 정치자금 문제는 구분하자는 ‘선별 구제론’을 주장해왔다. 신계륜·이상수 같은 인물들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박 위원장은 이날 회의가 열리자마자 작심한 듯 직격탄을 날리며 당 출신 위원들을 압박했다. 당 관계자는 “박 위원장의 단독 쿠데타”라고 반응했다. 박 위원장의 발언 요지는 이렇다.

“자의든 타의든 대의를 위한 희생은 나중에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 받는다. 항일투쟁 때 수많은 독립 투사를 보라. 우리는 국민이 원하는 후보를 골라내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간사해 자칫 대의를 잊어버리고 과거 습성에 젖어 자기도 모르게 평소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그러면 안 된다. 당이 살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번 한 번쯤은 희생하는 것도 18대 국회에 들어가는 것 못지않게 훌륭하게 평가 받을 것이다. 그렇게 큰 그릇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당초 당 출신 위원들은 일부 온건 성향의 외부 위원들과 선별 구제론을 기초로 한 중재안을 만들어 제시할 예정이었던 만큼 박 위원장에게 허를 찔린 셈이 됐다. 이후 진행된 비공개 회의에서도 박 위원장의 ‘일괄 배제론’을 놓고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공심위가 도무지 결론을 못 내리자 급기야 손학규·박상천 공동대표까지 나서 박 위원장 설득에 나섰다. 손 대표는 박 위원장에게 “당의 전체 총선 전략을 생각해 달라. 무조건 원칙을 내세운다고 선거에 보탬이 되는 게 아니다”고 했지만 박 위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공심위원장을 그만두겠다는 배수진까지 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이날 저녁 두 차례나 긴급 최고위원 회의를 소집해 마지막 절충점을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박 위원장은 전혀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심위 박경철 공보간사는 “최고위는 당을 위해서 일한 분들은 구제해주자고 말하지만 당을 위한다는 표현이 너무 애매모호해서 수용할 수가 없다. 국민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가치를 채택하자는 게 공심위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제 최고위가 공심위의 결정을 뒤집으려면 공심위를 해체하고 새로이 구성하는 방법 말고는 수단이 없다. 하지만 그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이 때문에 당내에선 박재승 위원장의 결론이 사실상 당론으로 굳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글=김정하·권호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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