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오래 가는 배우 되고 싶다면 '이순재의 변신'을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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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체험 삶의 현장’은 제목 그대로 유명인들이 서민의 일터를 찾아가 노동의 가치를 직접 겪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 의심이 가는 대목도 나온다.

진짜로 온종일 노동현장에서 땀 흘리는 것인지, 아니면 고생하는 장면을 부분적으로 연기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더러 있다. 평생 한 가지 일에 매진하는 사람 곁에서 카메라를 의식하며 열심히 ‘일하는 척하는’ 장면이 실례는 아닌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한결같은 사람이 어디서나 보기 좋은 건 아니다. 배우의 세계가 그렇다. 이 역을 맡아도, 저 역을 맡아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면 관객은 당장 외면한다. 변신도, 변심도 없는 사람은 연기자보다 모델에 어울린다. 냉장고, 혹은 아파트 앞에서 똑같은 이미지를 소비해도 지갑 열 준비가 된 소비자는 그다지 질리지 않는다.

방송사 분장실 풍경이 예전 같지 않다. 한 곳에 모여 분칠을 하며 선후배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침대까지 갖춰진 대형 차량을 타고 기획사가 붙여준 코디네이터·분장사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주연 배우들은 늙은 선배 배우들과 미리 마주칠 일이 없다. 리허설할 때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곧장 녹화에 들어가면 된다. 선배들이 어린 ‘스타’들의 예의 부족보다 훈련 미흡을 나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전문가가 되는 길은 수월치 않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하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수업을 한 학기 맡은 적이 있는데 이미 얼굴이 알려진 젊은 연기자들이 꽤 있었다. 놀라운 건 엄청 바쁠 것 같은 그들이 수업을 빼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10년 전에 수업을 들은 김하늘·박선영·차태현 등이 저마다 적재적소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보며 예술대학의 엄격한 교칙이 제대로 빛을 발한다는 생각을 했다.

늙어도 낡지 않는 배우가 되는 길은 없을까. 시트콤에서 귀여운 할아버지(‘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였다가 드라마에선 근엄한 임금(‘이산’의 영조)으로 바뀌었고 사극에서 죽음을 맞은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인자한 팔순노인(‘엄마가 뿔났다’의 나충복)으로 부활한 이순재씨. 연기경력만 53년째인 그가 “연기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하면 할수록 어려워진다”고 말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드라마 촬영장은 전문가들의 숨결이 앙상블을 이루는 일종의 연주회와 비슷하다. 불안하고 불편한 연기로 NG를 반복해서 낸다면 그건 실례를 넘어 경범죄에 해당된다.

시간의 도둑 역시 무형의 소매치기다. 카메라와 조명을 앞에 두고 연기지도를 해야 하는 연출자의 표정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무대에 서기 전에 교육과 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노배우의 간곡한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획사는 분장사만 붙여주지 말고 발성이나 화법을 가르쳐줄 선생을 먼저 찾아야 한다. 그게 서로가 오래 가는 길이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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