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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블랙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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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영국 택시인 검은색의 블랙캡. 빨간 이층버스와 함께 런던의 명물이다. 신사가 중절모를 쓴 채 탈 만큼 공간이 넉넉하다. 덩치에 비해 핸들은 부드럽다. 회전 반경은 경차 수준인 7.575m. 좁고 꼬불꼬불한 런던의 골목길을 잘도 헤집고 다닌다. 블랙캡은 승객을 태우면 어디서나 유턴이 허용된다. 손님을 빨리, 편하게 모시기 위해서다.

블랙캡 기사 시험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운전 실기에다 체력검사까지 통과해야 한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런던 지리. 도심의 넬슨 제독 동상에서 반경 9.6km(6마일) 이내의 길과 건물을 몽땅 외워야 한다. 건물만 1만3000여 개, 골목길은 2만5000개가 넘는다. 시험관이 번지수를 불러주면 가장 빠른 지름길이 입에서 술술 나와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2~3년간 시내를 샅샅이 돌아다녀야 ‘인간 내비게이션’에 합격할 정도다. 오죽하면 “옥스퍼드대에서 4년 만에 박사 따기보다 2년 만에 블랙캡 몰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까.

런던 시민의 블랙캡 사랑은 유별나다. 거리·시간·승객 수에 따라 다르지만 요금은 비싼 편이다. 그래도 누구나 군말없이 팁까지 얹어준다. 일단 블랙캡에 오르면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영국 국회의사당은 롤스로이스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곳이다. 하지만 블랙캡을 타면 무사통과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이나 찰스 왕세자까지 단골 손님이다. 블랙캡에는 차량번호와 함께 큼지막한 택시면허판이 붙어 있다. 기사들은 보안관처럼 가슴에 푸른색 배지를 당당하게 달고 다닌다.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런던에 외국 관광객이 몰리면서 이 차를 독점 생산하는 런던택시인터내셔널(LTI)의 주가는 2006년 290%나 올랐다.

이런 블랙캡이 갑자기 멸종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LTI는 이탈리아산 디젤 엔진을 얹어 매년 3000대의 블랙캡을 만든다. 문제는 엄격해진 선진국의 배기가스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디젤 엔진이다. 그렇다고 친환경 엔진을 개발하기에는 돈과 힘이 부친다. 요즘 LTI는 배기가스 규제가 느슨한 남아공과 나이지리아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눈독을 들이는 곳은 중국. LTI는 올해부터 지리(吉利)자동차와 연간 블랙캡 2만 대를 공동 생산하기로 했다. LTI는 “블랙캡이 중국에서라면 10년간은 끄떡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런던에서 사라지는 블랙캡이 머지않아 상하이의 명물로 둔갑할 판이다. 지구온난화가 세상을 바꾸는 한 단면이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