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드베데프 시대 권력 지도 ‘애국주의’ 무력파의 견제 만만치 않을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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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11면

메드베데프 시대의 개막 이후 크렘린의 권력지도는 어떻게 바뀔까. 크렘린 내부에서는 일단 ‘자유주의파’가 ‘실로비키(무력파)’를 제칠 것으로 전망된다.

실로비키는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그 후신인 연방보안국(FSB)과 같은 정보기관과 군·검찰 출신의 관료와 정치인을 일컫는 말이다. 체질적으로 국가주의 노선을 걷는 실로비키는 민족주의, 반(反)서방 성향이 강하고 민간이 아닌 국가 주도의 개혁 정책을 신봉한다. 사유재산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사기업을 철저히 국가통제 아래 두어야 하며 무엇보다 국가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니콜라이 파트루세프 FSB 국장, 블라디미르 우스티노프 법무부 장관, 크렘린 행정실(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인 이고리 세친 등이 핵심 멤버다. 2003년 미국의 석유 메이저와의 협력을 추진하며 크렘린에 도전하던 민간 석유기업 ‘유코스’를 파산시킨 것도 이들의 작품이다.

반면 정치·경제·법률 전문가 출신들로 구성된 자유주의파는 시장경제 원칙과 민간 주도의 개혁 정책을 선호하고 친서방 성향을 보인다. 경제 분야에서 국가 간섭을 줄이고 서방의 자유주의 체제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통합전력회사 사장인 아나톨리 추바이스가 수장 격이며 게르만 그레프 경제개발통상부 장관,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부 장관 등이 주요 멤버다. 추바이스는 최근 “러시아의 호전적 외교정책이 경제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초래했는지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그룹 모두 푸틴과 지연·학연·친분 관계 등으로 단단히 묶여 있으며 크렘린과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물밑으로 경쟁·갈등 관계를 드러내 왔다. 메드베데프는 푸틴 정권 초기에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 노선을 걸었으나 이후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자유주의파로 기울었다.

두 그룹의 힘겨루기는 언뜻 평온해 보인 푸틴의 후계 구도 확정 과정에서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실로비키 그룹은 푸틴의 후계자로 국방부 장관 출신의 세르게이 이바노프 제1부총리를 밀었다. 반면 자유주의자 그룹은 메드베데프를 지지했다. 푸틴이 후계자 선정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한 것도 두 그룹 가운데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무력파는 대선이 다가오면서 푸틴의 마음이 자유주의파인 메드베데프 쪽으로 기우는 낌새가 보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공세를 펼쳤다. 지난해 11월 느닷없이 쿠드린 장관의 측근인 재무부 차관이 공금횡령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이나, 푸틴이 400억 달러에 이르는 개인재산을 축적했다는 설(說)이 언론에 흘러나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자유주의파인 쿠드린 측근의 비리를 폭로해 도덕적 흠집을 내는 동시에 푸틴의 비리까지도 폭로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양측의 갈등은 두 그룹 모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푸틴의 결단으로 일단 봉합됐지만 대치 분위기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통치 이념을 관철시키려는 실로비키의 견제는 메드베데프 집권 초기에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 주도의 개혁정책을 밀어붙여 경제를 안정 궤도에 올리고, 강화된 핵 전력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외교적 지렛대로 사용해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을 정치적 과업으로 여기는 이들의 ‘애국주의’는 여전히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실로비키들의 충고에 더 자주 귀를 기울였던 푸틴의 시대가 끝나고 자유주의자인 메드베데프 정권이 들어서도 러시아의 대내외 정책 기조는 크게 바뀌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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