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육친(肉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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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육친(肉親)’-손택수(1970~ )

책장에 침을 묻히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버릇
막 닳인 간장 맛이라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혀에 갖다 대고
한참을 머물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곤 하지
세상엔 체액을 활자 위에 묻히지 않곤 넘어갈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혀의 동의 없이는 도무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글을 쓰던 버릇도 버릇이지만
책앞에서 침이 고이는 건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쓸쓸한 버릇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어린 날 오도독 오도독 씹은 생선뼈와 함께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그 침
페이지 페이지 얼룩이 되어 있네


내 어머니는 자식이 시인이니까 어머니도 시인이 되어야 한다며 내 시집을 늘 머리맡에 두고 읽으셨지. 시인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 마음은 다 같구나. 막 달인 간장 맛을 보듯 눌러 찍은 손가락을 대고 아들의 시집 귀퉁이에 침을 묻히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그 쓸쓸한 버릇이 있기에, 시인은 어머니의 체액 같은 언어로 진한 서정시를 쓸 수 있었구나.

<박형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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