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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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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0~80년대 마르크스 경제학에 관심있는 대학생들이 탐독하던 복사본 영어 원서 중 하나가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달의 원리(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다. 42년 스위지가 저술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이를 경제.사회적 분석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평을 들었고, 60~70년대 유럽 좌파운동의 이론적 지침서로 자리잡았다. 스위지는 또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선진국과 개도국의 관계로 표출된다고 지적하면서 P A 바란 등과 함께 종속이론의 기초를 쌓았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 경제학자(J K 갤브레이스), 급진적 경제학자들의 대부(월스트리트저널) 등으로 불리던 폴 스위지는 뉴욕 퍼스트내셔널은행(시티은행의 전신) 부행장의 막내로 태어나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영국 런던정경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고 33년 하버드대 대학원으로 돌아온 스위지는 스스로를 "무지하지만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규정했다. 대공황을 겪고 영국에서 조앤 로빈슨.오스카르 랑게 등과 교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한 것이다.

당대의 석학 조셉 슘페터 하버드대 교수는 대학원생 스위지를 끔찍이 아꼈지만, 둘의 지향점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스위지는 훗날 "내가 하버드에서 배운 주류경제학은 20세기의 주요 사건과 경향을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모교 교수직을 얻지 못하자 미련없이 학계를 떠난 스위지는 49년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The Monthly Review)를 창간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던 당시 쉽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독자는 전성기 때 1만2000명에서 7000여명으로 줄었지만, 이 잡지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노아의 방주 역할을 하고 있다.

주류사회에서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출신과 재능을 갖추었음에도 사회주의자로 일생을 살아온 스위지가 지난달 말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 사회의 진보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실천해온 그의 일생은 이념을 떠나 인류의 값진 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