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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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내가 배운 정신의학 이론 중에는 죽음이 자기 길인 사람은 그냥 죽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이론이 있소.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아마도 내가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것 같소.』 채영은 갑자기 작가의 호기심이 동했다.그래서 그에게 바싹 다가가며 물었다. 『왜 죽고 싶은데요?』 『그냥!피곤하니까.』 정민수가 심각하게 말했다.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정민수 흉내를 내며 CF멘트를 발하는 채영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던 것이다.민우는 그녀를 왈칵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역시 인간의 성욕은 위대한 것이다 .어저께까지 날 죽이려한여인에게 성욕이 일다니….민우가 턱에 손을 괴고 흥미롭게 귀를기울이는 것을 보고 채영은 빙긋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고수부지로 갔어요.그는 강둑에 서서 하염없이 강물만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나는 인생을 어디선가 솟아나오는 물줄기라고 생각하오.지표면에서 떠돌던 물이 증발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것은 다시 빗줄기가 되 어 땅위로 내려오죠.땅위 이곳저곳에 고여있는 물,그것이 바로 이곳저곳에서태어난 우리의 인생이죠.그렇게 태어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흐르는 것이오.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게 하염없이 흐르는 물을볼때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생 각이 들어요.그리고 그 흐르는 물길 속에 인생의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죠.계곡에서 굽이치는 물줄기,절벽에서 추락을 겁내지 않고 하얗게 부서지며 뛰어내리는 폭포…그들의 목표는 무엇일까.바로 영원한 안식처인 바다로가는 거죠.더이상 흐르 지 않아도 되는 바다,태고 때부터의 신비로움이 고이 간직돼 있는 바다.그 바다 가운데로 가는 것이 그들 물줄기가 가고자 하는 길이에요.그래서 나는 인생도 그들 물줄기 같이 하염없이 흘러야 한다고 생각하죠.언젠가는 영원한 안식처인 바 다에 도달할 수 있게끔…그러나 인간은 불행을 안고태어난 게 아무리 개인이 흐르고 싶다고 해도 흐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죠-.』 정민수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바로 인간이죠.인간은 인간이 흐르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질 않아요.끊임없이 간섭하고 설득하고 붙들려 하죠.내가 내 길을 가는데도 나는 많은 사람들의 간섭과 허락을 받아야 해요.그것을뿌리치자면 엄청난 싸움과 고통,피를 흘려야 하죠 .그래서 나는물줄기가 부럽기도 해요.그들도 엄청난 아픔의 길을 흘러가지만 그들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씩씩하게 흘러가니까요.물론 못난물줄기도 있어요.가운데서 흐르기가 숨가쁘다고 변두리로 피하기만하다가 결국에는 변두리 웅덩이에 고이는 것으로 만족하죠.대개 그런 물들은 그대로 썩거나 증발해 버리죠.그들은 더이상 살 가치가 없으니 다시 하늘로 증발해 올라가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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