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러시아 음대 학위’ 20명 1심 전원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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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가짜 러시아 학위 사건 관련자들이 전원 무죄로 나와 ‘부실 수사’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는 2006년 3월 가짜 러시아 음대 학위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돈을 주고 러시아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강사·교향악단 단원 등 100여 명을 적발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은 알선자를 구속하고 학위를 받은 교수 5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16명은 벌금 700만~10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약식기소된 사람들 중 14명은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이런 검찰의 판단은 1년11개월 만에 법원에서 전부 뒤집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6단독 박준민 판사는 19일 가짜 학위를 이용해 대학에 취업한 혐의(업무 방해) 등으로 기소됐던 교수 등 20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러시아 극동국립예술아카데미의 학위가 세계 유명 음악대학의 학위에 비해 허술한 점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이 학위를 공인한 만큼 가짜 학위는 아니다”고 결론지었다. 예술 분야에서 논문을 제출하지 않고 실기 테스트만으로 단기간(1년)에 박사학위를 준 케이스라는 것이다.

극동국립예술아카데미는 정규 과정 이외에 비정규 과정을 운영하면서 논문을 제출하지 않아도 박사학위를 줬다. 주로 방학을 이용해 러시아 현지에 가서 실기지도를 받고 러시아 교수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로 찾아와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학사 관리가 엄격한 미국이나 서유럽의 음악 대학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그럼에도 한국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독자적으로 내사를 벌인 러시아 검찰 역시 이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검찰 수사에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우선 학위의 진위를 확인하는 일을 검찰의 통역봉사요원에게 의존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역요원은 러시아에서 공부했지만 교육 전문가는 아니었다. 검찰의 요청을 받은 주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총영사가 성급하게 판단한 것도 검찰의 잘못된 판단에 큰 영향을 줬다.

검찰은 주한 러시아대사관 정무참사관을 ‘알선책’으로 분류하고 극동국립예술아카데미 총장을 지명수배 요청했었다. 자칫 외교적 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었던 대목이다.

피고인 측 방희선 변호사는 “이번 일은 수사 단계에서 제대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아 벌어졌다”며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세계 각국의 학위를 연구·분석해 특정 학위를 가짜 학위로 낙인찍는 일이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이 사건 관련자들은 기소 후 대학에서 보직 해임되는 등 피해를 봤다. 한 교수는 “검찰의 졸속 수사로 교수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명예가 손상됐다”며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은 “미국 줄리어드 음대의 박사 과정과 러시아 학위를 비교해 보라”며 22일 항소했다. 중앙일보는 2006년 3월 20일자 1면과 14면에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인용해 이 사건을 보도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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