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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공열전>살아잇는 釣仙 金洪東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평생을 살면서 한가지 취미에 빠져들어 경지에 이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오랜 세월에 걸쳐 엄청난 노력과 끈기 그리고 철학이 뒷받침돼야 한다.
등산과 함께 한국 대중레포츠의 양대산맥을 이뤄온 낚시계에서 발자취를 남긴 조옹(釣翁)들은 누구일까.이들은 「건강과 인생」을 낚으며 오늘도 삶의 맛과 멋을 만끽하고 있다.한국낚시의 맥(脈)을 이어온 한국판 강태공(姜太公)들의 일화를 연재한다.
[편집자註] 1930년대말과 1940년대초 「백넘버 9」를 달고 서울과 평양 그리고 도쿄(東京)와 베이징(北京)을 넘나들며 명성을 떨쳤던,오늘날 차범근(車範根)과 같은 「조선의 명선수」가 있었다.
팔순이 넘어선 그는 요즘 릴대를 거머쥐고 휴전선.설악산.오대산.지리산등을 축지법을 쓰는 산신령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강.남한강.금강.섬진강.서화천에서 신선처럼 노닐고 있다.
바로 살아있는 조선(釣仙)으로 존경받고 있는 김홍동(金洪東)옹-. 백만장자의 외아들로 태어나 보성전문(고려대전신) 재학중축구선수로 활약하다 일제시대에는 배일(排日)사상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됐던 「운동권」이었다.
50년대말 감옥생활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피골이 상접하고 머리털이 다 빠지다시피 했다.지금의 독두(禿頭.대머리)는 그때부터다.
『당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백약이 무효야.낚시를 하게.
』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던 金옹은 60년대초부터 낚싯대를 지팡이 삼아 토정(土亭)이지함(李之함)이 놀던 행주나루와 한명회(韓明會)가 유유자적하던 압구정 근처로 낚시를 나갔다.
한강에서 그는 희한한 낚시를 보았다.「견지낚시」라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낚시였다.
그는 토속낚싯배를 만들어 주로 물살이 센 여울에 들어가 배견지를 했다.이후 그는 노를 저어 건강과 고기를 낚으며 그때까지경험하지 못했던 인생의 희열을 즐겼다.
그후 나이가 들면서 릴이라는 서양낚시에 루어라는 가짜 미끼를달고 팔도강산을 휘저으며 쏘가리타작을 했다.
점차 그에게는 「쏘가리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고 낚시에 관한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제주도에 가서 다금바리를 낚고 아프리카 빅토리아호수나 사하라사막 한복판에 있는 호수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두만강.송화강에서 낚시에 몰입한 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
그외에도 낚시에 관한 활발한 집필활동을 했고 20여년전부터 어탁(魚拓)을 연구,이 분야에서 시조(始祖)가 됐다.
『죽을 병이 들면 낚시를 하라.』 낚시인 송우(宋祐.한국낚시전문가회의대표)씨는 『부연계곡으로 산천어 낚시를 갔을 때 80이 넘은 분이 소주 한병 반을 드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회고했다.
〈方元錫기자〉 ▲도움말.자료제공 송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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