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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아이들은 나란히 출발할 권리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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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는 경기도 일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 아침마다 내가 탄 버스가 한 중학교 앞을 지나는데, 그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 학교 정문에 내걸린 플래카드 문구 때문이다.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 우리의 어린이들, 담배연기로부터 보호합시다’.

보건소가 마련한 금연 홍보 플래카드다. 누가 카피를 썼는지 참 소박하면서도 정곡을 찔렀다 싶다.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이란 표현.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정말이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모든 아이는 혼자 보기 아깝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법이다.  

곧 봄방학이 지나고 3월이 오면 전국 초·중·고교가 일제히 신입생을 받고 재학생은 한 학년씩 올라간다. 겉으로는 다 같은 초등학교 1년생이요, 고교 3년생이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나 사는 지역에 따라 공부할 여건은 천차만별이다. 학업 성취도와 대학 진학률도 큰 차이가 난다. 똑같은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 아이들인데 실제 출발선은 너무 제각각이요, 들쭉날쭉이다. 서울 서초구의 15~19세 학생 인구는 2만4843명인데 이 지역 서울대 재학생은 803명이었다. 30.9명 대 1명꼴로 전국 최고다. 서울시 전체로는 77명 대 1명꼴. 그러나 전남지역 15~19세 인구와 서울대생 비율은 396명 대 1명, 경북은 310명 대 1명, 강원도는 305명 대 1명이다. 2년 전 국정감사 자료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강원도 양양군의 이진호 군수는 이달 12일 서울 강남의 사교육업체 K사와 ‘지역인재 육성을 위한 공교육 지원사업’ 계약을 맺었다. 계약에 따라 양양군 내 중·고교생은 다음 달부터 토·일요일마다 강남 유명강사로부터 방과후 수업을 받게 된다. 평일에는 K사가 제공하는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양양군이 강사료 등으로 6억원, K사가 온라인 인프라 구축에 2억8000만원을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 K사는 인근 횡성군과는 이미 지난해 봄에 계약을 맺고 온·오프라인 과외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횡성군에서는 농어촌 특별전형 케이스로 올해 2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18년만의 서울대 합격이라고 한다. 양양군도 여기에 자극 받았다.

‘지자체 사교육’ 붐은 거의 전국적이다. 횡성·양양군은 서울 입시전문 업체의 도움으로 농어촌 특별전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이다. 경북 봉화군은 일요일마다 종로학원 강사들을 초빙해 상위권 성적의 고교생을 맡긴다. 전북 순창군의 ‘옥천 인재숙’은 지자체가 나서서 기숙형 공립학원을 세운 경우다. 순창군이 서울 상위권 대학에 ‘혁혁한’ 진학률을 나타내면서 입시과열·교육양극화를 들어 비판하던 전교조 등의 목소리도 상대적으로 졸아들었다. 덩달아 인구 감소세가 멈추었고 타 시도에서 전입하는 주민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지자체가 세금을 들여 학원을 설립하고 강남 강사를 데려오는 일이 과연 온당한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지역의 공교육은 바지저고리인지, 수도권 명문대 합격률이 교육성취도의 잣대인지, 농어촌에서 그나마 공부마저 못하는 학생은 아예 불가촉(不可觸)천민(?) 취급을 받으란 얘기인지….

그러나 온갖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자체들의 몸부림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세금과 행정력을 교육에 쏟아부어 인재 유출을 막고 주민들 기 살리고 인구가 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대도시 아이와 비슷한 출발선에 서게 한다는 의미가 크다. 전교생이 63명뿐인 강원도 정선의 예미초등학교가 전국 어린이 영어 말하기대회를 휩쓴 것은 한 공기업(지역난방공사)이 자매결연을 맺고 힘껏 도운 덕분이었다. 폐광촌 어린이도 같은 출발선에만 서면 서울 아이 이상으로 잘 해낸다!

결국 어른들 책임이다. 혼자 보기 아까운 우리 아이들은 누구나 같거나 최소한 비슷한 출발선에 서서 균등한 기회를 누릴 권리가 있다. 어른들이 나서서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