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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떠날 때는 말 없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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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다산은 이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와중에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틈틈이 편지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생을 사는 바른 자세와 지혜를 전하려는 애틋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다산이 49세 되던 1810년(순조 10년) 장남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벼슬에서 해직된 때에는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절친한 벗이나 동지들이 머물러 있으라고 간청해도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독서하고 예를 익히며, 꽃을 심고 채소를 가꾸고 냇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어 선비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다산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것일까. 나흘 후면 후임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청와대를 떠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일 바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오전에 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고, 오후에 KTX를 타고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가는 것으로 돼 있다. 퇴임 후 고향으로 직행하는 첫 번째 전직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봉하마을 개발을 둘러싸고 말이 많다. 전직 대통령의 안락한 전원생활을 위해 혈세를 쏟아부어도 되는 것이냐는 비판과, 그와는 무관한 지역개발 사업이라는 반론이 팽팽하다. 다산의 충고대로 조용히 선비 생활을 즐기려는 것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퇴임과 동시에 낙향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나는 좀 너그럽게 봐주자는 쪽이다.

“전직 국가수반이란 존재는 유품으로 물려받은 대형 중국 자기와 같다.” 스페인 총리였던 펠리페 곤살레스가 한 말이다. 전직 대통령에 관한 가장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칠레 대통령이었던 리카르도 라고스는 2006년 3월 퇴임을 앞두고 미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곤살레스 전 총리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갑자기 집 안에 큰 중국 자기가 생겼다고 해보자. 어디다 둬야 할지 고민 아니겠는가. 귀하지만 성가신 존재, 그것이 바로 전직 대통령이다. 따라서 가급적 눈에 안 띄는 것이 좋다.”

라고스는 퇴임 당시에도 지지도가 70%를 웃도는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좌파주의자면서도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실업률을 낮추고, 빈곤 해소에 기여했다. 현재 그는 전직 국가수반들의 모임인 ‘마드리드 클럽’ 의장 겸 유엔 기후변화 특사로, 국내에선 눈에 안 띄지만 국제적으로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권위주의 문화를 타파하고, 서구식 복지국가의 초석을 다졌으며, 역사를 바로 세우고, 반부패 투명사회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켰다는 긍정적 평가와,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켰으며 부동산 가격과 사교육비를 증가시켰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브레인인 유우익 대통령실장 내정자는 “지난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미진하고 지나쳤던 부분, 왜곡됐던 부분을 바로잡고 소화하는 기간이었다”고 평가했다.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다. 색안경을 벗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실용주의는 출발하는 것이라고 볼 때 차기 정부에 대해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그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 떠날 때는 말 없이, 조용히 떠나는 것이다. 평가는 후세가 하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란 위치는 미묘한 자리다. 처신도 쉽지 않다. 퇴임 후 더 빛을 발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현직에서 쌓은 공까지 까먹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어느 쪽이 되느냐는 결국 본인 하기에 달려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