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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총선 개표 현장 르포] 집권당 “죽은 부토에 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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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일(현지시간) 파키스탄 카라치의 한 가판대에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읽고 있다. 18일 있었던 총선에서 야당의 압도적 승리로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지게 됐다. 가판대에 걸린 잡지의 표지 인물은 최근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다. [카라치 AFP=연합뉴스]

“죽은 부토의 농간이 아니고는 이럴 수는 없다.”

19일(현지시간) 오전 카라치 파키스탄 무슬림 리그-Q(PML-Q) 지구당 사무실에서 만난 라힐 이크바즈 대변인은 총선(18일) 결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18석을 가진 제1당에서 50석도 건지기 어려운 처지로 추락한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전날 오후만 해도 100여 명의 당원들로 붐볐던 당사엔 10여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크바즈 대변인은 “전국적인 선거 패배는 지난해 말 피살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에 대한 동정 표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의 동량이고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초드리 슈자트 후세인 당 총재 등 6명의 중진의원이 모두 낙선한 것은 ‘도저히 이해못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런 참패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샤라프 대통령 집권 후 경제는 고속성장을 했고 사회는 안정됐다. 야당이 연합해 부정선거를 했다”며 화살을 야당에 돌렸다.

앞서 18일 자정(현지시간) 카라치 크립턴가에 위치한 빌라와드 하우스 앞. 부토 전 총리의 카라치 자택이 있는 이곳은 부토가 이끌던 야당 파키스탄인민당(PPP)의 남부지역 선거본부 역할을 했다.

오후 11시쯤부터 몰려든 시민들은 자정이 되자 1000여 명으로 불었다. 총선 개표방송을 지켜보다 PPP가 압도적으로 이기자 기뻐서 몰려온 시민들이었다. PPP는 19일 오후 4시(한국시간) 현재 카라치가 속한 신드 주의 61개 의석 중 40석 이상을 확보했다.

시민들은 파키스탄 국기와 부토 전 총리가 조국 민주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진, PPP를 상징하는 화살표가 그려진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시민 한 명이 “조국의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숨진 부토 여사가 지금 집 앞에서 우리를 내려 보고 있다. 오늘의 승리는 그의 것이다. 그를 위해 춤을 추자”고 외쳤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100여 명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북소리와 박수소리가 어우러지며 사방은 디스코장을 방불케 했다.

환호에 취한 일부 시민은 이슬람 국가에선 금기인 술을 병째 들고 마셔댔다. 아마리 구리로(PPP 지구당 위원)는 “술이 아니라 민주의 성수(聖水)를 마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20여 분 춤판이 끝나자 PPP 카라치 지구당 타리크 칸 고문이 앞에 나섰다. “아직 우리의 갈 길은 멉니다. 선거에 승리했다고 하나 군부는 아직도 민주화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오늘의 승리가 군부에 짓밟힐지 모릅니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시민들은 “무샤라프 퇴진’ ‘부토, 민주’를 외치며 귀가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최대 주인 펀자브의 주도인 라호르 중심가 역시 19일 새벽까지 야당인 파키스탄 무슬림 리그-N(PML-N)의 승리를 환호하는 시민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오후 10시쯤부터 중심가에서 춤을 추며 ‘샤리프 총리’를 외쳤다. PML-N은 무샤라프 대통령의 1999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나와즈 무샤라프 전 총리가 이끄는 당이다.

현재 연방하원 의석이 18석인 군소정당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80석 이상 확보해 PPP와 함께 연정을 할 전망이다.

아르판 알리지 PML-N 명예당원은 “부토 피살 이후 민주와 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가 강했다. 여당은 군부독재 앞잡이고 부토가 이끌던 PPP는 정부와 마찰로 사회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우리당에 지지표가 몰렸다”고 분석했다.

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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