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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부른 힐러리의 꼼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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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남명집(南冥集) 민암부(民巖賦)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염예퇴는 중국 양쯔강의 삼협(三峽) 중 첫 번째 골짜기인 구당협(瞿塘峽)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주변엔 늘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었기 때문에 배가 함부로 지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수로의 안전을 위해 이 바위를 폭파해 버렸다. 하지만 염예퇴라는 말은 없어지지 않았다. 험난하고 위험한 상태를 일컫는 뜻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요즘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처지가 꼭 그와 같다. 그는 22개 주에서 경선이 실시됐던 ‘수퍼 화요일(2월 5일)’ 이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에게 8연패를 당했다. 그 바람에 대의원 확보 경쟁에서 오바마에게 추월당했으며, 지지율도 떨어졌다. 당 대통령후보는 떼어논 당상인 것처럼 여겨지던 분위기도 사라졌다.

힐러리호는 왜 염예퇴와 맞닥뜨리게 됐을까. 오바마의 돌풍이 강하게 분 것이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배를 그곳으로 저어 간 건 힐러리 자신이다. 지난달 3일 아이오와에서 오바마가 승리하자 힐러리 부부는 흑백 인종 문제를 건드렸다.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라크전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를 비판하며 “동화(童話) 같다”고 했다. 오바마가 고(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인용하며 ‘변화’를 외치자 힐러리는 “킹 목사의 꿈은 린든 존슨 전 대통령에 의해 실현됐다”고 공박했다.

흑인은 분노했다. 흑인인 오바마의 대선 도전을 실현 불가능한 동화 같은 이야기로 깎아내리고, 자신들의 우상인 킹 목사까지 업신여긴 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1월 26일)에서 본때를 보여줬다.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가 오바마에게 몰표(약 80%)를 던졌다. ‘흐느끼는 설움과 만나도 일어설지라, 폭풍과 만나도 일어설지라’라는 흑인 영가의 가사처럼 그들은 궐기했다.

그럼에도 힐러리 진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빌 클린턴은 “1984년과 88년 (흑인 목사인)제시 잭슨도 (흑인이 많은)사우스캐롤라이나에선 이겼다”며 흑인의 자존심을 또다시 건드렸다. 흑인들은 표로 응징했다. 12일 ‘포토맥 프라이머리’(흑인이 많이 사는 워싱턴DC와 그 주변의 메릴랜드·버지니아주 예비선거)에선 흑인의 90%가 오바마를 지지했다.

힐러리 측이 인종 카드를 꺼낸 건 백인 표를 더 얻을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정치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치졸하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힐러리는 결국 백인 표는 추가로 얻지 못한 채 흑인 표만 무더기로 잃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빌 클린턴이 ‘동화’ 발언을 하기 전 힐러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오바마에 앞서 있었다. 그곳 흑인층의 힐러리 지지율도 오바마보다 높았다. 그런 힐러리가 페어 플레이를 했다면 흑인들이 등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힐러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선전했을 것이고, 수퍼 화요일엔 더 좋은 성적을 올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후 8연전에서 오바마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명의 글처럼 민심은 물과 같아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엎어버릴 수도 있다. 힐러리호가 전복 위기에 처한 건 꼼수로 흑인뿐 아니라 많은 국민을 성나게 했기 때문이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