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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참화, 각성의 횃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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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숭례문 참화를 바라보는 첫날의 심정은 ‘참괴함’ 그 자체였다. 둘째 날 다시 가서 바라보니 이럴 수는 없다 싶은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셋째 날은 방화범도 잡히고 잘잘못의 윤곽도 드러났지만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생각보다는 우리 자신도 공범이라는 ‘자성(自省)’이 앞섰다. 마침내 넷째 날엔 문득 숭례문 참화가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차라리 또 다른 의미의 ‘벼락같은 축복’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왜냐고? 숭례문 스스로 자신의 몸을 태워 자만하고 정신 못 차리는 우리를 불같이 일깨워 줬기 때문이다. 사실 숭례문 참화가 남긴 잿더미는 자만하고 분별없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 숭례문 참화는 단순히 국보 1호를 망실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마저도 지켜내지 못한 우리의 폐허 같은 바닥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이제 그 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의 횃불이었던 셈이다. 나아가 그것은 600여 년에 걸친 영욕의 풍상을 한자리에서 겪으며 우리를 지켜봤던 숭례문의 혼이 절규하듯 스스로를 불살라 우리에게 내리는 준엄한 최후통첩이었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다. 1948년 건국 후 전쟁과 참화, 재건과 성장, 격동과 진통의 60년이었다. 주역에 이런 말이 있다. “심히 과하게 지붕을 얹고 리(利)의 세계로 나아가니 용마루가 휘어진다(大過棟橈利有攸往亨).” 지난 60년간 우리가 그 짝이었다. 숭례문은 그것을 말없이 지켜봐 왔다. 그리고 마침내 숭례문은 스스로의 몸을 태워 우리에게 준엄하게 경고하며 일깨웠다. 숭례문의 들보가 마른 송진을 뱉어내며 타들어간 것은 우리의 등뼈 속의 골수가 녹아난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미 뼛속까지 태웠다. 바닥 중의 바닥이다.

숭례문의 현판이 땅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깨달았어야 했다. 숭상해야 할 ‘예(禮)’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 대한 경고를 말이다. 예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예절 정도의 개념이 아니다. 주자가 ‘대학(大學)’에서 말한 예란 개인 생활에서 국가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삶 전반에 걸친 제도와 규범, 나아가 문화의 총화다. 따라서 숭례(崇禮)의 현판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전반적인 제도와 문화가 바닥을 쳤다는 말과 다름없다. 결국 숭례문 현판이 바닥에 나뒹굴었듯이 우리 삶 전반이 바닥을 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대로 된 나라의 기풍을 진작하고 진정한 예의 바탕인 문화를 새롭게 펼쳐야 한다. 물리적 복원만이 숭례문의 복원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복원은 우리의 기풍과 문화를 바닥부터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숭례문을 두 번 죽이지 않는 길이며 우리가 바닥 치고 다시 나아갈 방향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