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29.應氏盃최종결승전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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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전혀 예상치 못했다.조훈현의 고집과 배짱에 녜웨이핑(섭衛平)은 가슴이 가볍게 흔들렸다.『상대는 실패한 포석을 연거푸 세번째 들고 나왔다.실패의 비밀을 풀지 않았다면 그게 가능하겠는가.』 섭9단은 서서히 의심에 사로잡혔다.가슴을 흔들던 가벼운 진동은 이윽고 항거할 수 없는 지진으로 바뀌었다.섭9단은 제4착에서 방향을 틀었다.제2국과 제4국에서 두번이나 성공했던 포석을 스스로 포기했다.돌이켜 볼 때 이 순간이야말로 잉창치盃 결승 최종국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섭이 曺9단의 도전에 밀렸다.단 1밀리미터 밀린 것이지만 정신적인 겨루기에서 밀렸기에 걷잡을 수 없는 후유증을 몰고 왔던것이다. 예봉은 피해야 한다.그러나 피하는 자는 이기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쌍방 극한상황일 때는 후자 쪽이 더욱 옳다.
강철손 같은 섭의 힘은 이날따라 밋밋했다.白을 쥔 그는 8집의 큰 덤에 집착해 거듭 예봉을 피했고 그렇수록 曺9단의 도전은 강렬해졌다.점심 직전 曺9단은 보일듯 말듯한 승부수를 던졌다. 그런데 섭9단은 다시 물러섰다.그 찰나에 사실상 승부가 났다.曺9단은 일직선으로 白陣을 돌파해 순식간에 완승의 국면을만들어버렸다.
하나 승리가 목전에 다가오자 曺9단도 마(魔)의 터널에 들어선 듯 떨리기 시작했고 패배를 의식한 섭9단은 점차 용맹해졌다.급기야 바둑은 1집승부로 얽혀들었다.때마침 曺9단은 1분초읽기.섭은 1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오후 4시무렵 두 사람은 똑같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온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계산은 희미한데 기다릴 것이냐 치고나갈 것이냐. 섭9단은 강수로 나왔다.온종일 인내한 그는 이때가 기회라고 믿었다.『상대는 시간이 없으니 대마를 공격한다.동시에 시간을 공격한다!』 曺9단보다 섭9단이 한발 먼저 흔들렸고 결국은 그것이 패인이었다.시간공격은 도박이다.상대를 몰아붙이려면자신도 빨리 둬야 한다.섭은 曺9단의 대마를 잡아버릴 듯 사납게 몰아붙였으나 曺9단 쪽에서 기막힌 묘수가 등장했다.공격군의허 리가 뚝 잘리면서 거꾸로 잡혀버렸다.
섭은 완강하면서 후반이 정확하고,曺는 순발력이 강하다.결정적인 고비에서 섭이「순발력의 승부」를 벌인 것-그것이 패배를 자초했다. 모니터속에서 섭9단이 더듬더듬 돌을 던졌다.그걸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의 부인 쿵상밍(孔祥明)9단이 두손으로 얼굴을감싸쥐더니 검토실을 뛰쳐나갔다.응원나온 싱가포르 교민들이 함성을 질렀다.『이겼다!』 중국의 자존심,한국바둑의 사활,그리고 3억2천만원의 우승상금이 걸려있던 세기의 승부는 이렇게 끝났다.섭9단은 복기를 하다말고 입을 크게 벌린 채 허공을 봤다.딱멈춘 그 입에서 비명소리가 화면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한쪽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졌고,한쪽은 돌연 하늘로 솟구쳐올랐다.그때 曺9단은 오랜 세월 꿈꾸어온 것처럼 수만개의 꽃송이가 일시에 피어나는 것을 봤다.그는 환상의 정원 속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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